새마을호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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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광호.png|250픽셀|섬네일|관광호. 일본 [[신칸센]]을 따라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 [[파일:관광호.png|250픽셀|섬네일|관광호. 일본 [[신칸센]]을 따라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 ||
− | 새마을호의 전신인 | + | 새마을호의 전신인 [[관광호]]는 1969년 2월 10일 [[경부선]] 구간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관광호는 서울-대전-동대구-부산 단 4역에만 정차하는 VIP 고객들을 위한 열차였다. 관광호는 서울~부산 구간을 5시간 45분 만에 주파하였다. |
철도 기술이 열악하고 자금 사정도 넉넉지 않던 1960년대 말에 최고급 열차를 도입하겠다는 일념으로 거금을 들여 [[일본]]에서 객차와 발전차를 수입했다. 초기에는 [[신칸센]]을 어설프게 따라 한듯한 기관차를 사용하였으나 이 기관차는 이후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이 때문에 관광호를 ‘할 게 없어서 신칸센이나 모방한 흑역사’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철도 기술이 낙후된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든 선진국형 철도를 구사하려는 철도청의 고뇌도 담겨 있다. | 철도 기술이 열악하고 자금 사정도 넉넉지 않던 1960년대 말에 최고급 열차를 도입하겠다는 일념으로 거금을 들여 [[일본]]에서 객차와 발전차를 수입했다. 초기에는 [[신칸센]]을 어설프게 따라 한듯한 기관차를 사용하였으나 이 기관차는 이후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이 때문에 관광호를 ‘할 게 없어서 신칸센이나 모방한 흑역사’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철도 기술이 낙후된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든 선진국형 철도를 구사하려는 철도청의 고뇌도 담겨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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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당시 서울-부산 간 편도요금이 특1등칸 4700원, 1등칸 4200원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30-40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열차를 서민들의 이동수단 이상으로 보지 않던 시절에 도입된 호화열차 관광호는 한국 철도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엄청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당시 서울-부산 간 편도요금이 특1등칸 4700원, 1등칸 4200원이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30-40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열차를 서민들의 이동수단 이상으로 보지 않던 시절에 도입된 호화열차 관광호는 한국 철도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 ||
− | 운행을 시작할 당시부터 언론에서 심하게 비난받은 열차이기도 하다. 반일감정이 크던 시절에 신칸센을 모방한 외형으로 손가락질을 받았고, 높은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고 욕먹었다. 결국, 비난 여론을 견디다 못해 1974년에 | + | 운행을 시작할 당시부터 언론에서 심하게 비난받은 열차이기도 하다. 반일감정이 크던 시절에 신칸센을 모방한 외형으로 손가락질을 받았고, 높은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고 욕먹었다. 결국, 비난 여론을 견디다 못해 1974년에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같은 객차는 1982년까지 생산되었다. 1982년 생산된 객차는 무궁화호로 격하되었다가 통일호로 재격하되어 정선아리랑유람열차로 운행하였다. 그러나 열차 노후화로 2008년 운행을 종료하였다. |
=== 전성기 === | === 전성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