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xml:lang="ko">
	<id>https://nuriwiki.net/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Rookufer</id>
	<title>누리위키 - 사용자 기여 [ko]</title>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s://nuriwiki.net/api.php?action=feedcontributions&amp;feedformat=atom&amp;user=Rookufer"/>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w/%ED%8A%B9%EC%88%98:%EA%B8%B0%EC%97%AC/Rookufer"/>
	<updated>2026-06-23T15:18:50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generator>MediaWiki 1.39.17</generator>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90</id>
		<title>윤보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90"/>
		<updated>2015-10-18T11:33: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 야당 운동 */&lt;/p&gt;
&lt;hr /&gt;
&lt;div&gt;[[File:Yun Bo-seon.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lt;br /&gt;
&lt;br /&gt;
&#039;&#039;&#039;윤보선&#039;&#039;&#039;(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amp;lt;ref&amp;gt;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초기 활동 ===&lt;br /&gt;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lt;br /&gt;
&lt;br /&gt;
1930년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한 윤보선은 상하이로 독립운동하러 갈지 귀국할지를 놓고 머뭇거렸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생활비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윤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였다.&amp;lt;ref&amp;gt;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8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의 군국주의 사상에 염증을 느겼던 윤보선은 아무런 공직도 단체도 맡지 않고, 원산에 있던 집안 별장에서 골프치거나 독서하는 것, 담배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938년 엄청난 오한에 걸려 혼나자 내가 이런꼴을 겪으면서까지 담배피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오래 하다가 금연에 성공했다.&lt;br /&gt;
&lt;br /&gt;
영국식 합리주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깨끗한 거리에 빠졌던 윤보선은 해방 후, 자신이 서울시장이 되자 양변기를 들이는 일에 착수한다. 영국의 시민주의를 흠모했던 그는 총독부의 군국주의에도 비관적이었고,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사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lt;br /&gt;
&lt;br /&gt;
=== 해방 후 ===&lt;br /&gt;
해방 후 민중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대한적십자사 사장, 상공부장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재직 중 이승만이 미워하던 상공부 공무원 이태환을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나, 이때부터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lt;br /&gt;
&lt;br /&gt;
5.10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으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가지므로 행정에 대한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이듬해 [[5월 16일]],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내각과 함께 사퇴하려 하였으나, 국회(당시에는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가 해산되고 내각마저 총 사퇴한 상황에서 한국의 유일한 헌법 기관, 즉 대통령인 그마저 사퇴한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하야를 연기하였고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였다. 이후 직선제로 환원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lt;br /&gt;
&lt;br /&gt;
=== 야당 운동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lt;br /&gt;
&lt;br /&gt;
5대 대선때는 박정희가 패할 것을 대비해 [[김형욱]] 등이 윤보선을 암살하려 했지만, 미국 측에서 보호했다 한다.&amp;lt;ref&amp;gt;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45001.html&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72년 [[장준하]]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정당해산령으로 폐쇄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lt;br /&gt;
&lt;br /&gt;
=== 최후 ===&lt;br /&gt;
윤보선을 시종일관 미워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전두환은 허정, 함석헌, 박순천 등을 국가원로로 대우했고, 강원룡 역시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으면 전두환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음이 흔들렸던 윤보선도 더이상 정부에 대한 저항을 중단하고 집에 칩거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lt;br /&gt;
&lt;br /&gt;
* 집안의 주선으로 민영환의 6촌 동생인  민영철(閔泳喆)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민씨와의 사이는 삐그덕거렸고 별거하게 된다. 그러나 민씨 부인이 1937년 사망함으로써 결혼관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1948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단념한 여성 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한다.&lt;br /&gt;
&lt;br /&gt;
* 한살 연하의 삼촌 [[윤치영]]은 1924년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이승만]]의 골수 지지자였고, 이승만에게 천황이자 아버지이자 대통령이 되라고까지 권고했다. 가치관이 달랐던 삼촌과는 수시로 갈등했고, 윤치영이 한민당을 탈당하고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면서 갈등은 계속됐다. 1961년에는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은 지지하였다. 화가 난 윤보선은 국회에서 윤치영을 만났는데, 윤치영이 악수를 청하자 흥 하고 외면하고 가버렸다.&lt;br /&gt;
&lt;br /&gt;
* 윤치영이 박정희를 지지하여 그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하자, 윤보선의 어머니인 이범숙이 윤치영을 찾아가 숙질간에 싸우느냐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amp;lt;ref&amp;gt;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9</id>
		<title>윤보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9"/>
		<updated>2015-10-18T11:30: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 주석 */&lt;/p&gt;
&lt;hr /&gt;
&lt;div&gt;[[File:Yun Bo-seon.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lt;br /&gt;
&lt;br /&gt;
&#039;&#039;&#039;윤보선&#039;&#039;&#039;(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amp;lt;ref&amp;gt;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초기 활동 ===&lt;br /&gt;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lt;br /&gt;
&lt;br /&gt;
1930년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한 윤보선은 상하이로 독립운동하러 갈지 귀국할지를 놓고 머뭇거렸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생활비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윤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였다.&amp;lt;ref&amp;gt;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8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의 군국주의 사상에 염증을 느겼던 윤보선은 아무런 공직도 단체도 맡지 않고, 원산에 있던 집안 별장에서 골프치거나 독서하는 것, 담배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938년 엄청난 오한에 걸려 혼나자 내가 이런꼴을 겪으면서까지 담배피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오래 하다가 금연에 성공했다.&lt;br /&gt;
&lt;br /&gt;
영국식 합리주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깨끗한 거리에 빠졌던 윤보선은 해방 후, 자신이 서울시장이 되자 양변기를 들이는 일에 착수한다. 영국의 시민주의를 흠모했던 그는 총독부의 군국주의에도 비관적이었고,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사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lt;br /&gt;
&lt;br /&gt;
=== 해방 후 ===&lt;br /&gt;
해방 후 민중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대한적십자사 사장, 상공부장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재직 중 이승만이 미워하던 상공부 공무원 이태환을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나, 이때부터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lt;br /&gt;
&lt;br /&gt;
5.10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으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가지므로 행정에 대한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이듬해 [[5월 16일]],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내각과 함께 사퇴하려 하였으나, 국회(당시에는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가 해산되고 내각마저 총 사퇴한 상황에서 한국의 유일한 헌법 기관, 즉 대통령인 그마저 사퇴한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하야를 연기하였고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였다. 이후 직선제로 환원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lt;br /&gt;
&lt;br /&gt;
=== 야당 운동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lt;br /&gt;
&lt;br /&gt;
1972년 [[장준하]]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정당해산령으로 폐쇄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lt;br /&gt;
&lt;br /&gt;
=== 최후 ===&lt;br /&gt;
윤보선을 시종일관 미워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전두환은 허정, 함석헌, 박순천 등을 국가원로로 대우했고, 강원룡 역시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으면 전두환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음이 흔들렸던 윤보선도 더이상 정부에 대한 저항을 중단하고 집에 칩거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lt;br /&gt;
&lt;br /&gt;
* 집안의 주선으로 민영환의 6촌 동생인  민영철(閔泳喆)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민씨와의 사이는 삐그덕거렸고 별거하게 된다. 그러나 민씨 부인이 1937년 사망함으로써 결혼관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1948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단념한 여성 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한다.&lt;br /&gt;
&lt;br /&gt;
* 한살 연하의 삼촌 [[윤치영]]은 1924년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이승만]]의 골수 지지자였고, 이승만에게 천황이자 아버지이자 대통령이 되라고까지 권고했다. 가치관이 달랐던 삼촌과는 수시로 갈등했고, 윤치영이 한민당을 탈당하고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면서 갈등은 계속됐다. 1961년에는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은 지지하였다. 화가 난 윤보선은 국회에서 윤치영을 만났는데, 윤치영이 악수를 청하자 흥 하고 외면하고 가버렸다.&lt;br /&gt;
&lt;br /&gt;
* 윤치영이 박정희를 지지하여 그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하자, 윤보선의 어머니인 이범숙이 윤치영을 찾아가 숙질간에 싸우느냐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amp;lt;ref&amp;gt;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8</id>
		<title>윤보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8"/>
		<updated>2015-10-18T11:29:4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File:Yun Bo-seon.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lt;br /&gt;
&lt;br /&gt;
&#039;&#039;&#039;윤보선&#039;&#039;&#039;(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amp;lt;ref&amp;gt;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 초기 활동 ===&lt;br /&gt;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lt;br /&gt;
&lt;br /&gt;
1930년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한 윤보선은 상하이로 독립운동하러 갈지 귀국할지를 놓고 머뭇거렸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생활비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윤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였다.&amp;lt;ref&amp;gt;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8페이지&amp;lt;/ref&amp;gt; 총독부의 군국주의 사상에 염증을 느겼던 윤보선은 아무런 공직도 단체도 맡지 않고, 원산에 있던 집안 별장에서 골프치거나 독서하는 것, 담배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938년 엄청난 오한에 걸려 혼나자 내가 이런꼴을 겪으면서까지 담배피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오래 하다가 금연에 성공했다.&lt;br /&gt;
&lt;br /&gt;
영국식 합리주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깨끗한 거리에 빠졌던 윤보선은 해방 후, 자신이 서울시장이 되자 양변기를 들이는 일에 착수한다. 영국의 시민주의를 흠모했던 그는 총독부의 군국주의에도 비관적이었고,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사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lt;br /&gt;
&lt;br /&gt;
=== 해방 후 ===&lt;br /&gt;
해방 후 민중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대한적십자사 사장, 상공부장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재직 중 이승만이 미워하던 상공부 공무원 이태환을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나, 이때부터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lt;br /&gt;
&lt;br /&gt;
5.10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으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가지므로 행정에 대한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이듬해 [[5월 16일]],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내각과 함께 사퇴하려 하였으나, 국회(당시에는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가 해산되고 내각마저 총 사퇴한 상황에서 한국의 유일한 헌법 기관, 즉 대통령인 그마저 사퇴한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하야를 연기하였고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였다. 이후 직선제로 환원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lt;br /&gt;
&lt;br /&gt;
=== 야당 운동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lt;br /&gt;
&lt;br /&gt;
1972년 [[장준하]]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정당해산령으로 폐쇄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lt;br /&gt;
&lt;br /&gt;
=== 최후 ===&lt;br /&gt;
윤보선을 시종일관 미워했던 박정희와는 달리 전두환은 허정, 함석헌, 박순천 등을 국가원로로 대우했고, 강원룡 역시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으면 전두환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음이 흔들렸던 윤보선도 더이상 정부에 대한 저항을 중단하고 집에 칩거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lt;br /&gt;
&lt;br /&gt;
* 집안의 주선으로 민영환의 6촌 동생인  민영철(閔泳喆)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민씨와의 사이는 삐그덕거렸고 별거하게 된다. 그러나 민씨 부인이 1937년 사망함으로써 결혼관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1948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단념한 여성 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한다.&lt;br /&gt;
&lt;br /&gt;
* 한살 연하의 삼촌 [[윤치영]]은 1924년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이승만]]의 골수 지지자였고, 이승만에게 천황이자 아버지이자 대통령이 되라고까지 권고했다. 가치관이 달랐던 삼촌과는 수시로 갈등했고, 윤치영이 한민당을 탈당하고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면서 갈등은 계속됐다. 1961년에는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은 지지하였다. 화가 난 윤보선은 국회에서 윤치영을 만났는데, 윤치영이 악수를 청하자 흥 하고 외면하고 가버렸다.&lt;br /&gt;
&lt;br /&gt;
* 윤치영이 박정희를 지지하여 그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하자, 윤보선의 어머니인 이범숙이 윤치영을 찾아가 숙질간에 싸우느냐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amp;lt;ref&amp;gt;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7</id>
		<title>윤보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7"/>
		<updated>2015-10-18T11:28:5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파일:윤보선.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lt;br /&gt;
&lt;br /&gt;
&#039;&#039;&#039;윤보선&#039;&#039;&#039;(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amp;lt;ref&amp;gt;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amp;lt;/ref&amp;gt;&lt;br /&gt;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lt;br /&gt;
&lt;br /&gt;
=== 초기 활동 ===&lt;br /&gt;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lt;br /&gt;
&lt;br /&gt;
=== 해방 후 ===&lt;br /&gt;
해방 후 민중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대한적십자사 사장, 상공부장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재직 중 이승만이 미워하던 상공부 공무원 이태환을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나, 이때부터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lt;br /&gt;
&lt;br /&gt;
5.10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으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가지므로 행정에 대한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이듬해 [[5월 16일]],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내각과 함께 사퇴하려 하였으나, 국회(당시에는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가 해산되고 내각마저 총 사퇴한 상황에서 한국의 유일한 헌법 기관, 즉 대통령인 그마저 사퇴한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하야를 연기하였고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였다. 이후 직선제로 환원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lt;br /&gt;
&lt;br /&gt;
=== 야당 운동 ===&lt;br /&gt;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1972년 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정당해산령으로 폐쇄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lt;br /&gt;
&lt;br /&gt;
집안의 주선으로 민영환의 6촌 동생인  민영철(閔泳喆)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민씨와의 사이는 삐그덕거렸고 별거하게 된다. 그러나 민씨 부인이 1937년 사망함으로써 결혼관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1948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단념한 여성 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한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6</id>
		<title>윤보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B%B3%B4%EC%84%A0&amp;diff=18886"/>
		<updated>2015-10-18T11:28:2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파일:윤보선.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lt;br /&gt;
&lt;br /&gt;
&#039;&#039;&#039;윤보선&#039;&#039;&#039;(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lt;br /&gt;
&lt;br /&gt;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글래스고 대학에서 공부한다. 해방 후 민중일보 사장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회의장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대한적십자사 사장, 상공부장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상공부장관 재직 중 이승만이 미워하던 상공부 공무원 이태환을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다가 [[이승만]]의 눈밖에 나, 이때부터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lt;br /&gt;
&lt;br /&gt;
5.10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으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가지므로 행정에 대한 실권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 이듬해 [[5월 16일]],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내각과 함께 사퇴하려 하였으나, 국회(당시에는 민의원,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가 해산되고 내각마저 총 사퇴한 상황에서 한국의 유일한 헌법 기관, 즉 대통령인 그마저 사퇴한다면 [[북한]]이 쳐들어와도 한국은 국제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하야를 연기하였고 [[1962년]] [[3월]] 대통령직에서 하야 하였다. 이후 직선제로 환원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맞서는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D%B4%EC%8A%B9%EB%A7%8C&amp;diff=18885</id>
		<title>이승만</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D%B4%EC%8A%B9%EB%A7%8C&amp;diff=18885"/>
		<updated>2015-10-18T11:27:4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파일:이승만.jpg|250픽셀|섬네일|이승만]]&lt;br /&gt;
{{대사|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lt;br /&gt;
&lt;br /&gt;
&#039;&#039;&#039;이승만&#039;&#039;&#039;(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 말의 계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1948년 8월부터 1960년 4월까지 3번의 대통령 임기를 지냈으며 그의 임기는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당히 굴곡져 있다. 자(字)는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lt;br /&gt;
&lt;br /&gt;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수반이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국민들에 의해 축출됨으로서 대통령 임기를 끝마쳤다([[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lt;br /&gt;
&lt;br /&gt;
== 초기생애와 경력 ==&lt;br /&gt;
=== 초기생애 (1875–95) ===&lt;br /&gt;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 [[황해도]]에서 한 가난한 농촌 집안의 6대 독자-사실 2명의 형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에 [[천연두]]에 걸려 모두 죽었다-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이승만이 2살이던 1877년에 이승만 가족은 [[서울]]로 이사하였다. [[양녕대군]]의 사당이 있던 우수현 언덕 남쪽에서 살았는데, 아호 우남은 이 우수현에 있었다 해서 지은 아호이다.&amp;lt;ref&amp;gt;서정주, 우남 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1995) 참조&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서울에서 이승만은 낙동과 도동에 위치한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9살 때 [[천연두]]에 걸려 눈이 멀 뻔 했으나 그의 아버지 이경선이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에게 데려갔고 알렌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어릴 때의 이 경험은 이승만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미국을 동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lt;br /&gt;
&lt;br /&gt;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로 과거시험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승만은 여기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말,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창립한 [[협성회]]에 참가하였다. 협성회는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운동단체로서, 이 곳에서 이승만은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의 집필을 담당하였다.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이승만은 학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95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lt;br /&gt;
&lt;br /&gt;
=== 독립운동 (1896–1904) ===&lt;br /&gt;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복수 계획을 세웠으나, 한 미국인 의사의 만류로 마음을 돌렸다. 이승만은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단체를 통해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의 침략 야욕과 [[대한제국]]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는 여러 [[항쟁]]을 이끌었다. 1898년, 정부 산하의 법률자문기관인 [[중추원]]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얼마 뒤, 이승만은 [[박영효]] 일가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1899년 1월, [[경무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lt;br /&gt;
&lt;br /&gt;
이승만은 감옥살이 20일 째에 탈옥을 감행했으나, 곧 잡혔고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청일젼긔》, 《독립정신》, 《신영한사전》, 《뎨국신문》 등의 출판물을 번역하고 편집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안면경련]]을 일으키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04-10) ===&lt;br /&gt;
1904년,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발발하면서 [[민영환]]의 도움으로 특별 사면되었다.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8월, 이승만과 윤병규는 미국 뉴햄프셔 포츠머스에서, [[존 헤이]] [[미 국무장관]]과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이 때 미국 측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과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5년 9월 5일에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에는 &#039;&#039;&#039;&amp;quot;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다.&amp;quot;&#039;&#039;&#039;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었다. &lt;br /&gt;
&lt;br /&gt;
=== 임시정부 활동 (1910-45) ===&lt;br /&gt;
====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lt;br /&gt;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치하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YMCA 간사로 활동하며 기독교를 선교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한국독립인사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잡아들인 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1912년 M.C.Harris 등 미국의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신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추천하면서,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amp;lt;ref&amp;gt;이때 김규식도 오스트레일리아로 박사학위 취득하러 출국한다는 명분으로 피할 수 있었다.&amp;lt;/ref&amp;gt; &lt;br /&gt;
&lt;br /&gt;
미국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에게 105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선처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는 얻지 못했다.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위치한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태평양잡지》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1918년, 그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군사력을 키워 이를 바탕으로 무력항일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이 때문에 단체 내에서 갈등을 빚었다. 1918년 12월,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으나, 파리로 가려는 계획은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파리로 가는 대신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한인대표자대회를 열고 한국의 독립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lt;br /&gt;
&lt;br /&gt;
1919년 [[3·1 운동]] 이후, 이승만은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하이]]에 위치한 [[한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다. 6월에는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문을 각국에 보냈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다. 9월 6일, 이승만은 상하이의 한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갈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대통령 업무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미국으로 되돌아와 [[워싱턴 회의]]에 참석,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디시 돌아와 출판, 구미위원부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교육, 종교 관련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상하이로 송금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1924년 11월에는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lt;br /&gt;
&lt;br /&gt;
==== 임정 탄핵과 복귀 ====&lt;br /&gt;
1925년 3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규탄하며, 대통령직에서 [[탄핵]]시켰다.&amp;lt;ref&amp;gt;동시에 이승만과 갈등했던 이동휘 계열의 사회주의자 집단,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 집단도 임시정부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하다가 떠나게 된다.&amp;lt;/ref&amp;g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스스로를 한성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일컬었으며 구미위원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34년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이곳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오스트리아]] 여인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lt;br /&gt;
&lt;br /&gt;
임시정부에서는 구미위원부 폐쇄령을 내렸지만 이승만은 거부했고 도리어 미국의 교민단체들에게 임정으로 송금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1928년]]에는 [[박용만]]&amp;lt;ref&amp;gt;이승만과 동지였다가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적이 된 우성 박용만과,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이자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두 명의 박용만이 있다. 보통 전자는 아호를 붙여 우성 박용만으로 부른다.&amp;lt;/ref&amp;gt;이 [[북경]]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이구서에게 암살당하자 [[안창호]]의 국민회와 이승만, 서재필 등은 임정을 규탄하는 사설들을 미국내 한인 신문인 [[삼일신보]]에 기고했다. [[삼일신보]]는 미국내 한인 신문 중에서도 국민회회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신문이었다. [[김구]]는 편지를 보내 박용만은 밀정이라서 살해한 것이니 형님은 서재필과 안창호 등을 설득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amp;lt;ref&amp;gt;「김구(金九)가 이승만(李承晩)에게」, 김구, &amp;quot;백범 김구선생의 편지&amp;quot;, (도서출판 나남, 2005)&amp;lt;/ref&amp;gt;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한다.&lt;br /&gt;
&lt;br /&gt;
[[1933년]] [[3월 6일]]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면서 이승만을 임정 국무위원으로 위촉했다.&amp;lt;ref&amp;gt;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쪽&amp;lt;/ref&amp;gt; 그때가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있었으며, 8년만에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이승만은 [[신익희]]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amp;lt;ref&amp;gt;[http://www.kopogo.com/bbs/board.php?bo_table=govstory&amp;amp;wr_id=14 4월의 임시정부 소사]&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기다)라는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대로 같은 해 12월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사태가 발발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미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충칭]] 임시정부 외교부 의장의 직책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무부]]에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45년, 국제기구에 대한 UN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참가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lt;br /&gt;
&lt;br /&gt;
=== 한국 귀국과 정치 입문 (1945–48)===&lt;br /&gt;
1945년,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미군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갔다. 한국의 독립 직후 [[더글라스 맥아더]]와 비밀만남을 가진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맥아더의 전용 비행기 &#039;&#039;The Bataan&#039;&#039;을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한국으로 되돌아온 뒤,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장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승만은 강한 [[반공주의]] 노선을 주장하였으며 외국세력의 개입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1945)의 합의문 내용인 한국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공동 신탁통치 하겠다는 결정에 반발하였으며 동시에 [[공산당]]을 매국노로 보고 공산주의자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였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 가입도 거절하였다.&lt;br /&gt;
&lt;br /&gt;
첫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이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에 한국정부는 완전한 독립정부로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이승만은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워싱턴 D.C]]로 가서 관련 [[로비]] 활동을 벌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에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은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lt;br /&gt;
&lt;br /&gt;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새로이 창설되었다. 1948년 5월,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의원선거]]가 국제연합한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이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구 갑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곧 제1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초 제헌 헌법은 내각제안이 유력했으나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가 되었고, 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lt;br /&gt;
&lt;br /&gt;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선거]]에서 92.3%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에 앞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에는 협력할 뜻이 없음을 미리 밝힌 [[김구]]는 이 선거에서 6.7%의 득표율로 2위에 머물렀다.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선포되었다. &lt;br /&gt;
&lt;br /&gt;
== 대통령 임기 ==&lt;br /&gt;
=== 반공주의 ===&lt;br /&gt;
대통령직에 오른 이승만은 [[반공주의]]에 기초한 법안들을 시행하였다.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던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실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공안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그는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데 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을 특별히 신임하였으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김창룡은 자신의 반대파를 거리낌 없이 숙청시켰다. &lt;br /&gt;
&lt;br /&gt;
=== 한국전쟁 ===&lt;br /&gt;
이승만과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을 눌러버리고 한반도를 통일시키기를 원했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중무기를 배치하지 않은 반면, 소련은 북한에 소련제 전투기와 탱크를 전면 배치해두고 있었다. &lt;br /&gt;
&lt;br /&gt;
이렇게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이 심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서 남한을 침공하였다. 6월 26일, 이승만은 [[도쿄]]에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내려왔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이범석]]의 건의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범석]]은 비상국무회의에서 한강 철교를 폭파할 것을 안건으로 내놓았고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통과됐다.&amp;lt;ref&amp;gt;이윤영, 백사 이윤영 회고록, (집문당, 1984)&amp;lt;/ref&amp;gt; 한강철교 폭파의 기안자가 누군지는 철저하게 함구되다가 관련 당사자들이 다 죽고 [[이윤영]] 목사도 죽기 전에,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자서전을 남겨놓겠다며 이를 기술하였다. 한강철교 폭파는 임시정부 출신 김홍일 중장이 지휘하였다.&amp;lt;ref&amp;gt;박경석, 오성장군 김홍일, 서문당, 1984&amp;lt;/ref&amp;gt; 북한 인민군은 같은 날 새벽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유력한 설에 의하면) 한강 도하장비 부족으로 이틀을 서울에서 지체한 뒤, 30일에 [[한강]]을 건넜다. 북한군의 서울에서의 이틀간의 지체는 이후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lt;br /&gt;
&lt;br /&gt;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동안 이승만은 [[부산]]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전시내각 국무위원을 증원, 보선하였으며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대한민국은 국가소멸의 위기를 넘겼다. &lt;br /&gt;
&lt;br /&gt;
=== 재선 ===&lt;br /&gt;
[[한국전쟁]]은 이승만을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던 [[대한민국]]을 기적적으로 지켜낸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가히 대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이승만은 대통령선거 제도를 종전의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에서 직접선거 방식으로 바꾸었다. 한국전쟁 도중에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선거]](1952년) 결과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였다.&lt;br /&gt;
&lt;br /&gt;
=== 삼선과 사임 ===&lt;br /&gt;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연임 제한 조항을 없애버렸고,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선거]](1956년)에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전국적인 대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리한 연임에 반발하는 국민의 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지지율을 확보해가던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 도중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70%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3선에 성공하였다. &lt;br /&gt;
&lt;br /&gt;
이때 자유당은 이승만을 재출마하게 하려고 소와 말까지 동원하며 이승만 박사 재출마 청원 대회를 열었다.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우의마의라는 단어가 나타났다.&lt;br /&gt;
&lt;br /&gt;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선거]](1960년)에 출마하였다. 하지만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1달 앞두고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유일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진 부통령선거에서는 [[이기붕]]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 측의 엄청난 규모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남 마산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는 의문의 실종을 당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곧 이승만은 이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자기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은 어차피 선거여부에 관련없이 당선 확정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lt;br /&gt;
&lt;br /&gt;
곧 책임자인 이기붕은 당선사퇴를 고려한다 했다가 사퇴하고 물러났다.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도 바로 사퇴했다. 하지만 성난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이승만은 이 요구에 대해 &#039;&#039;&#039;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039;&#039;&#039;라고 발언하며 꽤나 쿨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4·19 혁명]]). 의외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군중은 오히려 수고했다고 박수치며 환호했다 한다. &lt;br /&gt;
&lt;br /&gt;
=== 망명과 최후 ===&lt;br /&gt;
그러나 민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면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부 차관은 이승만에게 하와이 요양을 권하는 형식으로 내보냈다. 민주당 신파이면서도 이승만 처벌에 반대했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에게 영감 일처리 잘했다고 했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이승만을 그냥 내보냈느냐며 반발했다. &lt;br /&gt;
&lt;br /&gt;
그러자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은 [[장면]]이 이승만을 배신했다고 공격했고, [[허정]]에게는 이승만을 요양보내게 한다면서 영원히 못돌아오게 했느냐고 따졌다.&amp;lt;ref&amp;gt;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amp;lt;/ref&amp;gt;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이곳에서 생을 보내다가 [[실어증]] 등에 걸려 하와이 마우레타니아 요양원에 입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원인은 [[뇌일혈]]이었다.&amp;lt;ref&amp;gt;경향신문 1965.07.20.  1면 정치면&amp;lt;/ref&amp;gt;&lt;br /&gt;
&lt;br /&gt;
== 알고 계셨나요? ==&lt;br /&gt;
* 이승만은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대신에, 이승만은 강대국-특히 [[미국]]-과의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하였습니다. 비록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독립을 건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이승만이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대한민국의 대통령}}&lt;br /&gt;
&lt;br /&gt;
{{번역된 문서|en|Syngman_Rhee}}&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4</id>
		<title>박중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4"/>
		<updated>2015-10-18T11:26:4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 주석 */&lt;/p&gt;
&lt;hr /&gt;
&lt;div&gt;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amp;lt;ref&amp;gt;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amp;lt;/ref&amp;gt;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lt;br /&gt;
&lt;br /&gt;
1905년 농상공부의 공무원이 되고, 1906년에는 군부 기사, 군부 군기창 기사를 지냈지만 그만두었다. 러일전쟁 당시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관으로 다녀왔으며, 다시 유학을 결심했다가 실패하고 의친왕의 일본 수행원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lt;br /&gt;
&lt;br /&gt;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3</id>
		<title>박중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3"/>
		<updated>2015-10-18T11:26: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amp;lt;ref&amp;gt;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amp;lt;/ref&amp;gt;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lt;br /&gt;
&lt;br /&gt;
1905년 농상공부의 공무원이 되고, 1906년에는 군부 기사, 군부 군기창 기사를 지냈지만 그만두었다. 러일전쟁 당시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관으로 다녀왔으며, 다시 유학을 결심했다가 실패하고 의친왕의 일본 수행원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lt;br /&gt;
&lt;br /&gt;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lt;br /&gt;
&lt;br /&gt;
== 주석 ==&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2</id>
		<title>박중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2"/>
		<updated>2015-10-18T11:2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amp;lt;ref&amp;gt;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amp;lt;/ref&amp;gt;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lt;br /&gt;
&lt;br /&gt;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lt;br /&gt;
&lt;br /&gt;
1905년 농상공부의 공무원이 되고, 1906년에는 군부 기사, 군부 군기창 기사를 지냈지만 그만두었다. 러일전쟁 당시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관으로 다녀왔으며, 다시 유학을 결심했다가 실패하고 의친왕의 일본 수행원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lt;br /&gt;
&lt;br /&gt;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1</id>
		<title>박중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B%B0%95%EC%A4%91%EC%96%91&amp;diff=18881"/>
		<updated>2015-10-18T11:20:5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새 문서: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lt;/p&gt;
&lt;hr /&gt;
&lt;div&gt;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amp;lt;ref&amp;gt;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amp;lt;/ref&amp;gt;&lt;br /&gt;
&lt;br /&gt;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lt;br /&gt;
&lt;br /&gt;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lt;br /&gt;
&lt;br /&gt;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lt;br /&gt;
&lt;br /&gt;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80</id>
		<title>허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80"/>
		<updated>2015-10-18T11:13:3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허정(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lt;br /&gt;
&lt;br /&gt;
부산에서 중인 출신 객주 허문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경성으로 유학가 YMCA 학당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이때 [[이승만]]을 처음 만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때 알게된 교수 [[김성수]]의 인품에 감화되어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기도 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갈등에 회의감을 품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을 하다가 다시 1921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친임시정부 기관지 [[삼일신보]]사의 기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책으로도 활동한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회 회장이 되고, 1923년 삼일신보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에 [[이승만]]에게 호소해서 귀국한다. 그 뒤 정치, 사회사업에서 손을 떼고 탄광 개발로 돈을 벌어들였다.&lt;br /&gt;
&lt;br /&gt;
일본 패전 이후 1945년 8월 [[김성수]], [[송진우]]의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9월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시장 고문관 겸 군정청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2월 한민당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고 임정을 봉대하기 위해 준비한 ‘국민대회준비회’에 참여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정계 인사가 [[장덕수]]를 암살하자, [[김구]]를 직접 찾아가 따질수 없었던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 대놓고 따졌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민주의원의원 비서국에서 [[장준하]],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의원 비서국 직원에 선발됐고 1947년 9월 미국의 한국문제 UN상정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민주당의 신임 상임위원 선출 때 장덕수, 김준연, 백관수, 함상훈, 서상일등과 신임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총무처장이 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퇴했다. 1948년 10월 교통부장관이 되어 다시입각, 1950년 11월∼1952년 1월에는 사회부장관, 1952년 4~7월에는 무임소장관으로 재임했으며 1951∼1952년에는 국제연합에 [[6.25 전쟁]] 지지를 호소하러 [[장면]] 총리가 떠나자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됐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친위대인 [[자유당]]을 설립했으며,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 [[임영신]]에 의해 친여 성향의 제2정당 [[대한국민당]]이 조직되어 활동하자 내각을 사퇴하고,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한다. 그러다 이승만의 계속된 요청으로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발탁되었다. 1960년에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 인사들을 개각할 때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총리 대행)이 되었다.&lt;br /&gt;
&lt;br /&gt;
하야한 이승만에 대한 정치보복을 두려워해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당시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 의원이면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을 찾아와 일처리 잘했다고 칭찬했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러나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은 누구 허락도 받지 않고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유폐하였느냐며 트집잡게 된다.&lt;br /&gt;
&lt;br /&gt;
1960년 6월 국무총리가 되고 총리자격으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한다. 8월 선거를 치루어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지만 윤보선과 야당후보단일화를 하던 중, [[윤보선]]이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자 그와 한번 크게 싸운 뒤 후보자리를 양보하였다. 5대 대선과 6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지만 1969년부터 1984년까지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80년부터는 전두환 정부에의해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종신까지 재직한다.&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amp;lt;references/&amp;gt;&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9</id>
		<title>허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9"/>
		<updated>2015-10-18T11:13:1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허정(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lt;br /&gt;
&lt;br /&gt;
부산에서 중인 출신 객주 허문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경성으로 유학가 YMCA 학당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이때 [[이승만]]을 처음 만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때 알게된 교수 [[김성수]]의 인품에 감화되어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기도 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갈등에 회의감을 품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을 하다가 다시 1921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친임시정부 기관지 [[삼일신보]]사의 기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책으로도 활동한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회 회장이 되고, 1923년 삼일신보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에 [[이승만]]에게 호소해서 귀국한다. 그 뒤 정치, 사회사업에서 손을 떼고 탄광 개발로 돈을 벌어들였다.&lt;br /&gt;
&lt;br /&gt;
일본 패전 이후 1945년 8월 [[김성수]], [[송진우]]의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9월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시장 고문관 겸 군정청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2월 한민당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고 임정을 봉대하기 위해 준비한 ‘국민대회준비회’에 참여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정계 인사가 [[장덕수]]를 암살하자, [[김구]]를 직접 찾아가 따질수 없었던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 대놓고 따졌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민주의원의원 비서국에서 [[장준하]],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의원 비서국 직원에 선발됐고 1947년 9월 미국의 한국문제 UN상정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민주당의 신임 상임위원 선출 때 장덕수, 김준연, 백관수, 함상훈, 서상일등과 신임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총무처장이 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퇴했다. 1948년 10월 교통부장관이 되어 다시입각, 1950년 11월∼1952년 1월에는 사회부장관, 1952년 4~7월에는 무임소장관으로 재임했으며 1951∼1952년에는 국제연합에 [[6.25 전쟁]] 지지를 호소하러 [[장면]] 총리가 떠나자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됐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친위대인 [[자유당]]을 설립했으며,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 [[임영신]]에 의해 친여 성향의 제2정당 [[대한국민당]]이 조직되어 활동하자 내각을 사퇴하고,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한다. 그러다 이승만의 계속된 요청으로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발탁되었다. 1960년에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 인사들을 개각할 때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총리 대행)이 되었다.&lt;br /&gt;
&lt;br /&gt;
하야한 이승만에 대한 정치보복을 두려워해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당시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 의원이면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을 찾아와 일처리 잘했다고 칭찬했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러나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은 누구 허락도 받지 않고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유폐하였느냐며 트집잡게 된다.&lt;br /&gt;
&lt;br /&gt;
1960년 6월 국무총리가 되고 총리자격으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한다. 8월 선거를 치루어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지만 윤보선과 야당후보단일화를 하던 중, [[윤보선]]이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자 그와 한번 크게 싸운 뒤 후보자리를 양보하였다. 5대 대선과 6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지만 1969년부터 1984년까지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80년부터는 전두환 정부에의해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종신까지 재직한다.&lt;br /&gt;
&lt;br /&gt;
== 주석 ==&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8</id>
		<title>허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8"/>
		<updated>2015-10-18T11:13:0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허정(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lt;br /&gt;
&lt;br /&gt;
부산에서 중인 출신 객주 허문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경성으로 유학가 YMCA 학당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이때 [[이승만]]을 처음 만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때 알게된 교수 [[김성수]]의 인품에 감화되어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기도 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갈등에 회의감을 품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을 하다가 다시 1921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친임시정부 기관지 [[삼일신보]]사의 기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책으로도 활동한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회 회장이 되고, 1923년 삼일신보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에 [[이승만]]에게 호소해서 귀국한다. 그 뒤 정치, 사회사업에서 손을 떼고 탄광 개발로 돈을 벌어들였다.&lt;br /&gt;
&lt;br /&gt;
일본 패전 이후 1945년 8월 [[김성수]], [[송진우]]의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9월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시장 고문관 겸 군정청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2월 한민당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고 임정을 봉대하기 위해 준비한 ‘국민대회준비회’에 참여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정계 인사가 [[장덕수]]를 암살하자, [[김구]]를 직접 찾아가 따질수 없었던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 대놓고 따졌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민국민주의원의원 비서국에서 [[장준하]],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의원 비서국 직원에 선발됐고 1947년 9월 미국의 한국문제 UN상정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민주당의 신임 상임위원 선출 때 장덕수, 김준연, 백관수, 함상훈, 서상일등과 신임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총무처장이 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퇴했다. 1948년 10월 교통부장관이 되어 다시입각, 1950년 11월∼1952년 1월에는 사회부장관, 1952년 4~7월에는 무임소장관으로 재임했으며 1951∼1952년에는 국제연합에 [[6.25 전쟁]] 지지를 호소하러 [[장면]] 총리가 떠나자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됐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친위대인 [[자유당]]을 설립했으며,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 [[임영신]]에 의해 친여 성향의 제2정당 [[대한국민당]]이 조직되어 활동하자 내각을 사퇴하고,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한다. 그러다 이승만의 계속된 요청으로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발탁되었다. 1960년에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 인사들을 개각할 때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총리 대행)이 되었다.&lt;br /&gt;
&lt;br /&gt;
하야한 이승만에 대한 정치보복을 두려워해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당시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 의원이면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을 찾아와 일처리 잘했다고 칭찬했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러나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은 누구 허락도 받지 않고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유폐하였느냐며 트집잡게 된다.&lt;br /&gt;
&lt;br /&gt;
1960년 6월 국무총리가 되고 총리자격으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한다. 8월 선거를 치루어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지만 윤보선과 야당후보단일화를 하던 중, [[윤보선]]이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자 그와 한번 크게 싸운 뒤 후보자리를 양보하였다. 5대 대선과 6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지만 1969년부터 1984년까지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80년부터는 전두환 정부에의해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종신까지 재직한다.&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7</id>
		<title>허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D%97%88%EC%A0%95&amp;diff=18877"/>
		<updated>2015-10-18T11:12:1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새 문서: 허정(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부산에서 중인 출신 객주 허문일의...&lt;/p&gt;
&lt;hr /&gt;
&lt;div&gt;허정(許政, 1896년 4월 8일 ~ 1988년 9월 1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lt;br /&gt;
&lt;br /&gt;
부산에서 중인 출신 객주 허문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경성으로 유학가 YMCA 학당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이때 [[이승만]]을 처음 만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때 알게된 교수 [[김성수]]의 인품에 감화되어 해방 후 [[한민당]]에 참여하게 된다.&lt;br /&gt;
&lt;br /&gt;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기도 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임정의 갈등에 회의감을 품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을 하다가 다시 1921년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친임시정부 기관지 [[삼일신보]]사의 기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책으로도 활동한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회 회장이 되고, 1923년 삼일신보 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에 [[이승만]]에게 호소해서 귀국한다. 그 뒤 정치, 사회사업에서 손을 떼고 탄광 개발로 돈을 벌어들였다.&lt;br /&gt;
&lt;br /&gt;
일본 패전 이후 1945년 8월 [[김성수]], [[송진우]]의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9월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시장 고문관 겸 군정청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2월 한민당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고 임정을 봉대하기 위해 준비한 ‘국민대회준비회’에 참여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임정계 인사가 [[장덕수]]를 암살하자, [[김구]]를 직접 찾아가 따질수 없었던 허정은 [[조소앙]]을 찾아가 대놓고 따졌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반감을 갖게 된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lt;br /&gt;
&lt;br /&gt;
[[1946년]] [[2월]] 대한민국민주의원의원 비서국에서 [[장준하]],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의원 비서국 직원에 선발됐고 1947년 9월 미국의 한국문제 UN상정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민주당의 신임 상임위원 선출 때 장덕수, 김준연, 백관수, 함상훈, 서상일등과 신임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총무처장이 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퇴했다. 1948년 10월 교통부장관이 되어 다시입각, 1950년 11월∼1952년 1월에는 사회부장관, 1952년 4~7월에는 무임소장관으로 재임했으며 1951∼1952년에는 국제연합에 [[6.25 전쟁]] 지지를 호소하러 [[장면]] 총리가 떠나자 국무총리서리에 임명됐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이승만]]이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친위대인 [[자유당]]을 설립했으며,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 [[임영신]]에 의해 친여 성향의 제2정당 [[대한국민당]]이 조직되어 활동하자 내각을 사퇴하고,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한다. 그러다 이승만의 계속된 요청으로 1957∼1959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발탁되었다. 1960년에는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 인사들을 개각할 때 외무부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대통령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총리 대행)이 되었다.&lt;br /&gt;
&lt;br /&gt;
하야한 이승만에 대한 정치보복을 두려워해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당시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 의원이면서 싸우는 것을 싫어하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을 찾아와 일처리 잘했다고 칭찬했다.&amp;lt;ref&amp;gt;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amp;lt;/ref&amp;gt; 그러나 이승만의 지지자 [[윤치영]]은 누구 허락도 받지 않고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유폐하였느냐며 트집잡게 된다.&lt;br /&gt;
&lt;br /&gt;
1960년 6월 국무총리가 되고 총리자격으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한다. 8월 선거를 치루어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지만 윤보선과 야당후보단일화를 하던 중, [[윤보선]]이 끝까지 양보를 거부하자 그와 한번 크게 싸운 뒤 후보자리를 양보하였다. 5대 대선과 6대 대선 당시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지만 1969년부터 1984년까지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80년부터는 전두환 정부에의해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종신까지 재직한다.&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C%B9%98%ED%98%B8&amp;diff=18876</id>
		<title>윤치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C%B9%98%ED%98%B8&amp;diff=18876"/>
		<updated>2015-10-18T11:11:2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lt;/p&gt;
&lt;hr /&gt;
&lt;div&gt;윤치호(1865년 1월 26일 - 1945년 12월 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계몽사상가, 교육자이다. 친일파라 보기에는 애매한 인물로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의 일본 국회의원 입후보권과 선거권, 일본 국정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일본 정부에 하게 되면서 소극적이지만 학병 독려 칼럼을 몇편 신문에 냈다가 그대로 친일파로 몰리게 된다. 호는 좌옹(佐翁)이다.&lt;br /&gt;
&lt;br /&gt;
== 생애 ==&lt;br /&gt;
조선 선조 때에 영의정과 보국숭록을 지낸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형제 정승의 먼 후손이었지만 윤치호의 고조할아버지가 서자였고, 아버지도 서자였다. 양반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해서 관직에 나가는 바람에 양반이 된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가 멸시당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lt;br /&gt;
&lt;br /&gt;
원래 윤웅렬의 둘째 부인인 전주이씨 이일영의 딸의 아들이었지만, 윤웅렬의 본부인이 죽자 윤웅렬은 아들을 낳아준 이정무를 정실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윤치호에게는 이복누나 한 명과 친누나 윤경희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첩들 중 한명에게서는 29년 연하의 윤길용이, 또다른 아버지의 첩 김정순에게서는 30년 연하의 윤치왕, 윤치창 등의 이복 형제들이 태어난다.&lt;br /&gt;
&lt;br /&gt;
개화당의 당원이었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이라는 아버지 윤웅렬의 충고를 받아들여, [[갑신정변]]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후, 도피성 유학을 한다.&lt;br /&gt;
&lt;br /&gt;
초기에 동지들의 죽음에 실성하였지만 [[감리교]] 목사를 만나 지도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아버지 윤웅렬과 삼촌 윤영렬까지 개종시킨다.&lt;br /&gt;
&lt;br /&gt;
청나라에 있을 때 중서서원에서 만난 마애방과 결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인문학을, 에모리 대학 옥스포드 분교에서는 신학을 배우고 귀국한다.&lt;br /&gt;
&lt;br /&gt;
귀국 후 [[이상재]], [[유길준]], 1897년 귀국한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구성하여 국회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당시 민초들은 그를 역적취급했다. 윤치호는 [[서재필]]과 함께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토론했다. [[서재필]]은 즉시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와 참정권을 주자 했고, 윤치호는 다소 시기상조라며 평민에게 참정권을 얻어낸 뒤에 해야 한다고 토론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독립협회는 황국협회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고, 실망한 윤치호는 국민들을 냉소적으로 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리고 고종 퇴위가 결정되었을 때 그는 한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약들은 무효이며 불법 조약이라는 전단지를 돌렸다. [[고종]]은 내심 흐뭇해했지만 윤치호를 도와주지 못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 외무협판(외무차관)에 임명된 윤치호는  조약 체결을 기회로 관직에서 물러났다.&lt;br /&gt;
&lt;br /&gt;
1910년 10월 한일합방 당시 윤치호는 자헌대부라는 품계를 가진 이유로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1911년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남작 작위를 마지못해 받아들이지만 윤치호가 [[신민회]]에 가입하고, 교육 계몽과 실력 양성으로 한 이 단체 활동에 어느정도 깊이 관여한 일로 그는 고문당하고 투옥된다. 1915년에 선처를 호소하고 풀려났지만 총독부가 주는 지위는 거절했다. 1918년에 대정친목회에 가입했지만 월급도 없는 자리라고 스스로 조롱한다.&lt;br /&gt;
&lt;br /&gt;
== 기타 ==&lt;br /&gt;
그는 젊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신념하에 좌옹, 앉을 좌와 노인 옹, 앉을 좌를 분해하면 왼쪽(측면)에 앉아서 도와준다는 뜻의 좌옹을 아호로 삼았다.&lt;br /&gt;
&lt;br /&gt;
조카 [[윤보선]]의 후처 [[공덕귀]]의 회고록에 의하면 윤치호는 귀국 직후 자기 집의 노비문서들을 다 불태우고, 노비들을 그 즉시 석방했다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을 설득하는데, 윤웅렬과 윤영렬은 1905년에 가서야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석방시킨다.&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C%B9%98%ED%98%B8&amp;diff=18875</id>
		<title>윤치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s://nuriwiki.net/index.php?title=%EC%9C%A4%EC%B9%98%ED%98%B8&amp;diff=18875"/>
		<updated>2015-10-18T11:08:52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Rookufer: 새 문서: 윤치호(1865년 1월 26일 - 1945년 12월 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계몽사상가, 교육자이다. 친일파라 보기에는 애매한 인물로 중일전쟁 이후,...&lt;/p&gt;
&lt;hr /&gt;
&lt;div&gt;윤치호(1865년 1월 26일 - 1945년 12월 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계몽사상가, 교육자이다. 친일파라 보기에는 애매한 인물로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의 일본 국회의원 입후보권과 선거권, 일본 국정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일본 정부에 하게 되면서 소극적이지만 학병 독려 칼럼을 몇편 신문에 냈다가 그대로 친일파로 몰리게 된다.&lt;br /&gt;
&lt;br /&gt;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형제 정승의 먼 후손이었지만 고조할아버지가 서자였고, 아버지도 서자였다. 양반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아버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해서 관직에 나가는 바람에 양반이 된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가 멸시당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lt;br /&gt;
&lt;br /&gt;
원래 윤웅렬의 둘째 부인인 전주이씨 이일영의 딸의 아들이었지만, 윤웅렬의 본부인이 죽자 윤웅렬은 아들을 낳아준 이정무를 정실부인으로 올려주었다. 윤치호에게는 이복누나 한 명과 친누나 윤경희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첩들 중 한명에게서는 29년 연하의 윤길용이, 또다른 아버지의 첩 김정순에게서는 30년 연하의 윤치왕, 윤치창 등의 이복 형제들이 태어난다.&lt;br /&gt;
&lt;br /&gt;
개화당의 당원이었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할 것이라는 아버지 윤웅렬의 충고를 받아들여, [[갑신정변]]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후, 도피성 유학을 한다.&lt;br /&gt;
&lt;br /&gt;
초기에 동지들의 죽음에 실성하였지만 [[감리교]] 목사를 만나 지도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귀국해서는 아버지 윤웅렬과 삼촌 윤영렬까지 개종시킨다.&lt;br /&gt;
&lt;br /&gt;
청나라에 있을 때 중서서원에서 만난 마애방과 결혼,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인문학을, 에모리 대학 옥스포드 분교에서는 신학을 배우고 귀국한다.&lt;br /&gt;
&lt;br /&gt;
귀국 후 [[이상재]], [[유길준]], 1897년 귀국한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구성하여 국회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국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당시 민초들은 그를 역적취급했다. 윤치호는 [[서재필]]과 함께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토론했다. [[서재필]]은 즉시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와 참정권을 주자 했고, 윤치호는 다소 시기상조라며 평민에게 참정권을 얻어낸 뒤에 해야 한다고 토론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다. 독립협회는 황국협회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고, 실망한 윤치호는 국민들을 냉소적으로 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리고 고종 퇴위가 결정되었을 때 그는 한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약들은 무효이며 불법 조약이라는 전단지를 돌렸다. [[고종]]은 내심 흐뭇해했지만 윤치호를 도와주지 못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 외무협판(외무차관)에 임명된 윤치호는  조약 체결을 기회로 관직에서 물러났다.&lt;br /&gt;
&lt;br /&gt;
1910년 10월 한일합방 당시 윤치호는 자헌대부라는 품계를 가진 이유로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1911년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남작 작위를 마지못해 받아들이지만 윤치호가 [[신민회]]에 가입하고, 교육 계몽과 실력 양성으로 한 이 단체 활동에 어느정도 깊이 관여한 일로 그는 고문당하고 투옥된다. 1915년에 선처를 호소하고 풀려났지만 총독부가 주는 지위는 거절했다. 1918년에 대정친목회에 가입했지만 월급도 없는 자리라고 스스로 조롱한다.&lt;br /&gt;
&lt;br /&gt;
[[분류:독립운동가]]&lt;br /&gt;
[[분류:정치인]]&lt;/div&gt;</summary>
		<author><name>Rookufer</name></author>
	</entry>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