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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승만.jpg|250픽셀|섬네일|이승만]] {{대사|대한민국 최초 연예기획자}}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한국 최초의 연예기획자이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수반이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국민들에 의해 축출됨으로서 대통령 임기를 끝마쳤다([[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 초기생애와 경력 == === 초기생애 (1875–95) ===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 [[황해도]]에서 한 가난한 농촌 집안의 6대 독자-사실 2명의 형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에 [[천연두]]에 걸려 모두 죽었다-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이승만이 2살이던 1877년에 이승만 가족은 [[서울]]로 이사하였다. [[양녕대군]]의 사당이 있던 우수현 언덕 남쪽에서 살았는데, 아호 우남은 이 우수현에 있었다 해서 지은 아호이다.<ref>서정주, 우남 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1995) 참조</ref> 서울에서 이승만은 낙동과 도동에 위치한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9살 때 [[천연두]]에 걸려 눈이 멀 뻔 했으나 그의 아버지 이경선이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에게 데려갔고 알렌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어릴 때의 이 경험은 이승만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미국을 동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로 과거시험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승만은 여기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말,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창립한 [[협성회]]에 참가하였다. 협성회는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운동단체로서, 이 곳에서 이승만은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의 집필을 담당하였다.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이승만은 학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95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 독립운동 (1896–1904) ===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복수 계획을 세웠으나, 한 미국인 의사의 만류로 마음을 돌렸다. 이승만은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단체를 통해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의 침략 야욕과 [[대한제국]]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는 여러 [[항쟁]]을 이끌었다. 1898년, 정부 산하의 법률자문기관인 [[중추원]]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승만은 [[박영효]] 일가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1899년 1월, [[경무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이승만은 감옥살이 20일 째에 탈옥을 감행했으나, 곧 잡혔고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청일젼긔》, 《독립정신》, 《신영한사전》, 《뎨국신문》 등의 출판물을 번역하고 편집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안면경련]]을 일으키게 되었다. ===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04-10) === 1904년,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발발하면서 [[민영환]]의 도움으로 특별 사면되었다.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8월, 이승만과 윤병규는 미국 뉴햄프셔 포츠머스에서, [[존 헤이]] [[미 국무장관]]과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이 때 미국 측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과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5년 9월 5일에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에는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었다. === 임시정부 활동 (1910-45) === ====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치하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YMCA 간사로 활동하며 기독교를 선교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한국독립인사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잡아들인 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1912년 M.C.Harris 등 미국의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신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추천하면서,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f>이때 김규식도 오스트레일리아로 박사학위 취득하러 출국한다는 명분으로 피할 수 있었다.</ref> 미국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에게 105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선처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는 얻지 못했다.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위치한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태평양잡지》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1918년, 그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군사력을 키워 이를 바탕으로 무력항일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이 때문에 단체 내에서 갈등을 빚었다. 1918년 12월,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으나, 파리로 가려는 계획은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파리로 가는 대신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한인대표자대회를 열고 한국의 독립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이승만은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하이]]에 위치한 [[한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다. 6월에는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문을 각국에 보냈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다. 9월 6일, 이승만은 상하이의 한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갈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대통령 업무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미국으로 되돌아와 [[워싱턴 회의]]에 참석,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디시 돌아와 출판, 구미위원부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교육, 종교 관련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상하이로 송금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1924년 11월에는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 임정 탄핵과 복귀 ==== 1925년 3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규탄하며, 대통령직에서 [[탄핵]]시켰다.<ref>동시에 이승만과 갈등했던 이동휘 계열의 사회주의자 집단,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 집단도 임시정부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하다가 떠나게 된다.</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스스로를 한성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일컬었으며 구미위원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34년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이곳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오스트리아]] 여인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임시정부에서는 구미위원부 폐쇄령을 내렸지만 이승만은 거부했고 도리어 미국의 교민단체들에게 임정으로 송금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1928년]]에는 [[박용만]]<ref>이승만과 동지였다가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적이 된 우성 박용만과,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이자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두 명의 박용만이 있다. 보통 전자는 아호를 붙여 우성 박용만으로 부른다.</ref>이 [[북경]]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이구서에게 암살당하자 [[안창호]]의 국민회와 이승만, 서재필 등은 임정을 규탄하는 사설들을 미국내 한인 신문인 [[삼일신보]]에 기고했다. [[삼일신보]]는 미국내 한인 신문 중에서도 국민회회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신문이었다. [[김구]]는 편지를 보내 박용만은 밀정이라서 살해한 것이니 형님은 서재필과 안창호 등을 설득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ref>「김구(金九)가 이승만(李承晩)에게」, 김구, "백범 김구선생의 편지", (도서출판 나남, 2005)</ref>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한다. [[1933년]] [[3월 6일]]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면서 이승만을 임정 국무위원으로 위촉했다.<ref>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쪽</ref> 그때가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있었으며, 8년만에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이승만은 [[신익희]]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ref>[http://www.kopogo.com/bbs/board.php?bo_table=govstory&wr_id=14 4월의 임시정부 소사]</ref>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기다)라는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대로 같은 해 12월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사태가 발발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미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충칭]] 임시정부 외교부 의장의 직책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무부]]에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45년, 국제기구에 대한 UN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참가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 한국 귀국과 정치 입문 (1945–48)=== 1945년,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미군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갔다. 한국의 독립 직후 [[더글라스 맥아더]]와 비밀만남을 가진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맥아더의 전용 비행기 ''The Bataan''을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한국으로 되돌아온 뒤,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장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승만은 강한 [[반공주의]] 노선을 주장하였으며 외국세력의 개입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1945)의 합의문 내용인 한국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공동 신탁통치 하겠다는 결정에 반발하였으며 동시에 [[공산당]]을 매국노로 보고 공산주의자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였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 가입도 거절하였다. 첫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이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에 한국정부는 완전한 독립정부로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이승만은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워싱턴 D.C]]로 가서 관련 [[로비]] 활동을 벌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에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은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새로이 창설되었다. 1948년 5월,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의원선거]]가 국제연합한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이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구 갑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곧 제1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초 제헌 헌법은 내각제안이 유력했으나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가 되었고, 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선거]]에서 92.3%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에 앞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에는 협력할 뜻이 없음을 미리 밝힌 [[김구]]는 이 선거에서 6.7%의 득표율로 2위에 머물렀다.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선포되었다. == 알고 계셨나요? == * 이승만은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대신에, 이승만은 강대국-특히 [[미국]]-과의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하였습니다. 비록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독립을 건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이승만이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주석 == <references/> {{번역된 문서|en|Syngman_Rhee}} [[분류:독립운동가]] [[분류:연예인]]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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