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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전 ==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일관계는 특별히 나쁜 것 없었다. 물론 시대에 따라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하고 우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현재의 반일감정이나 혐한과 같은 극단적인 반감이 있는 적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 삼국시대 === 인류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한일 양국은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인종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 역사를 많은 부분 공유한다. 한국의 삼국시대라고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만 떠올리나, 사실 여기에 [[왜]](일본)이 함께 하는 4국시대([[가야]]까지 합친다면 5국시대)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지적이 있다. 오늘날의 인식과 달리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민족이라는 인식은 옅었고, 오히려 백제와 왜의 유대관계는 매우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백제는 일본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특히 백제의 왕인 박사는 [[천자문]] 책을 들고 가서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은 백제가 [[마한]]을 정벌하는데 군사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백제가 일본의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당시의 한일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4-5세기에는 백제와 일본이 연합하여 [[신라]]를 연속적으로 침공하였다([[신라-왜 전쟁]]).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지원하면서 신라는 멸망을 겨우 면하였으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 통일신라시대 === 백제의 멸망 직후 일본은 백제의 부활을 위해 많은 군사를 보내어 신라와 [[백강전투]](663)를 치렀다. 그러나 백강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내부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마저 정벌하러 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고, 반대로 일본이 신라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나당연합을 배신한 [[당나라]]가 신라와 일본의 공통 위협으로 떠오르면서, 이에 대항하는 두 나라의 관계는 강화되었다. 따라서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증가하였으며, 특히 일본은 신라로부터 [[율령제]]를 도입하여 국가를 체계적, 중앙집권적으로 정비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일본이 한반도 국가들과 정치적으로 깊게 관여하며 행동하였던 것과 달리,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일본은 한반도와 사신 파견 등의 문물 교류는 이어가되, 정치적으로는 선을 그으며 불간섭 정책을 펼쳤다. 즉, 신라의 통일을 기점으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가 명확하게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고려시대 === 1259년 [[여몽전쟁]]에서 패배하고 [[원나라]]의 사실상 속국으로 떨어진 [[고려]]는 원나라의 주도로 여몽연합군을 구성,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1274, 1281)에 나섰다. 이 전쟁은 세계 대제국 건설을 꿈꾸고 있던 원나라의 요구로 이루어졌으며, 고려는 얻을 게 없는 전쟁에 억지로 끌려 나간 입장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일본에 정규군이 침략한 이 전쟁은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인해 여몽연합군이 큰 피해를 보면서 비교적 허무하게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한국이 일본을 침공한 것은 이때가 유일한 것이므로, 양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역사시기 대부분 동안 매우 평화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시대 === 조선시대 들어서, 조선과 일본 모두 [[명나라]]의 조공국이 되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대등한 이웃 국가 관계가 되었다. 조선은 기본적인 외교방침인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따라서 이웃 국가인 일본과 친선을 도모[交隣]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대하여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사용하며 한일관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419년(세종1년), 조선은 [[이종무]]를 앞세워 대규모의 병력으로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였다. 여기서 조선은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나, 대마도를 아예 조선땅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이는 애초에 침략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1426년(세종8년)에는 제포(창원), 동래포(부산), 염포(울산)의 3포를 개항하여 일본과의 무역을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왜구는 소멸하였고, 일본은 정당한 상업 행위를 통해 한국의 문물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일관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총력전을 펼친 유일한 침략 전쟁이다.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인의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조선 침략을 강행하였으나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으로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조선은 결과적으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 전체에 걸쳐 궤멸적인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의 머릿속에는 ‘일본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적대감이 심어지게 되었다. 즉, 임진왜란은 역사적으로 반일감정이 생긴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관계는 의외로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1609년(광해군1년)에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재개된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이다. 조선이 여기에 응한 것은 ‘말 안 들어주면 또 쳐들어올까 봐’ 같은 두려움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교류가 이어지면서 양국의 신뢰가 쌓여 조선통신사는 순수한 문화 교류의 장으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도쿠가와 정권의 요청으로 12차례의 [[조선통신사]] 파견이 있었으며 이는 [[에도 막부]] 시대 내내 200년간 이어졌다. 한 번에 400~500명의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며, 10달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에도 막부 시기 일본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어 이러한 조선통신사는 거의 유일한 외부 문화 유입의 장이 되었다. 조선통신사 덕분에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재의 한일갈등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조선통신사기록물은 한국과 일본 공동의 노력으로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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