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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생애 ===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매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양의 선진 문물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특히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집 안을 드나드는 사냥꾼들과 어울려서 [[화승총]]을 매고 다니며 사냥을 하는 것을 즐겼는데,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안중근은 명사수로 이름나 있었다. 1985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군사를 조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안태훈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대장인 [[김구]]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며 지켜주기도 하였다. 이때 김구는 안태훈의 첫째 아들인 안중근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당시 김구의 나이는 19살, 안중근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독립운동가의 역사적인 만남이었으나, 깊은 교류는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였던 니콜라 빌렘(한국 이름 홍석구)에게 세례를 받고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은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교육을 위해 대학교를 건립해야 한다는 안중근의 주장에 대해,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종교를 믿는 일에는 방해가 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안중근과 마찰을 빚었다. 프랑스인 신부들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에 매몰되어 있으며, 한국인들을 열등한 인종 취급하며 선교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중근은 크게 실망하고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이는 안중근이 서양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범아시아주의|아시아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남아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교육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1906년, 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진남포로 거처를 옮긴 안중근은 이곳에 [[삼흥학교]]를 세웠다. 또한, 진남포 [[천주교|천주교회]]에서 설립한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삼흥학교 및 돈의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1907년, 안중근은 일본제국의 감시를 피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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