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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1930년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한 윤보선은 상하이로 독립운동하러 갈지 귀국할지를 놓고 머뭇거렸고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윤치소는 생활비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윤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귀국하였다.<ref>구국의 가시밭길(윤보선, 한국정경사, 1967년) 38페이지</ref> 총독부의 군국주의 사상에 염증을 느겼던 윤보선은 아무런 공직도 단체도 맡지 않고, 원산에 있던 집안 별장에서 골프치거나 독서하는 것, 담배 피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938년 엄청난 오한에 걸려 혼나자 내가 이런꼴을 겪으면서까지 담배피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오래 하다가 금연에 성공했다. 영국식 합리주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깨끗한 거리에 빠졌던 윤보선은 해방 후, 자신이 서울시장이 되자 양변기를 들이는 일에 착수한다. 영국의 시민주의를 흠모했던 그는 총독부의 군국주의에도 비관적이었고, 이승만의 일민주의,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에 대해서 비인간적인 전체주의 사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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