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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활동 (1910-45) === ====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치하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YMCA 간사로 활동하며 기독교를 선교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한국독립인사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잡아들인 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1912년 M.C.Harris 등 미국의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신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추천하면서,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f>이때 김규식도 오스트레일리아로 박사학위 취득하러 출국한다는 명분으로 피할 수 있었다.</ref> 미국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에게 105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선처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는 얻지 못했다.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위치한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태평양잡지》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1918년, 그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군사력을 키워 이를 바탕으로 무력항일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이 때문에 단체 내에서 갈등을 빚었다. 1918년 12월,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으나, 파리로 가려는 계획은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파리로 가는 대신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한인대표자대회를 열고 한국의 독립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이승만은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하이]]에 위치한 [[한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다. 6월에는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문을 각국에 보냈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다. 9월 6일, 이승만은 상하이의 한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갈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대통령 업무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미국으로 되돌아와 [[워싱턴 회의]]에 참석,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디시 돌아와 출판, 구미위원부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교육, 종교 관련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상하이로 송금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1924년 11월에는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 임정 탄핵과 복귀 ==== 1925년 3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규탄하며, 대통령직에서 [[탄핵]]시켰다.<ref>동시에 이승만과 갈등했던 이동휘 계열의 사회주의자 집단,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 집단도 임시정부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하다가 떠나게 된다.</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스스로를 한성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일컬었으며 구미위원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34년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이곳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오스트리아]] 여인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임시정부에서는 구미위원부 폐쇄령을 내렸지만 이승만은 거부했고 도리어 미국의 교민단체들에게 임정으로 송금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1928년]]에는 [[박용만]]<ref>이승만과 동지였다가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적이 된 우성 박용만과,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이자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두 명의 박용만이 있다. 보통 전자는 아호를 붙여 우성 박용만으로 부른다.</ref>이 [[북경]]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이구서에게 암살당하자 [[안창호]]의 국민회와 이승만, 서재필 등은 임정을 규탄하는 사설들을 미국내 한인 신문인 [[삼일신보]]에 기고했다. [[삼일신보]]는 미국내 한인 신문 중에서도 국민회회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신문이었다. [[김구]]는 편지를 보내 박용만은 밀정이라서 살해한 것이니 형님은 서재필과 안창호 등을 설득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ref>「김구(金九)가 이승만(李承晩)에게」, 김구, "백범 김구선생의 편지", (도서출판 나남, 2005)</ref>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한다. [[1933년]] [[3월 6일]]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면서 이승만을 임정 국무위원으로 위촉했다.<ref>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쪽</ref> 그때가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있었으며, 8년만에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이승만은 [[신익희]]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ref>[http://www.kopogo.com/bbs/board.php?bo_table=govstory&wr_id=14 4월의 임시정부 소사]</ref>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기다)라는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대로 같은 해 12월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사태가 발발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미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충칭]] 임시정부 외교부 의장의 직책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무부]]에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45년, 국제기구에 대한 UN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참가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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