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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임기 == === 반공주의 === 대통령직에 오른 이승만은 [[반공주의]]에 기초한 법안들을 시행하였다.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던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실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공안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그는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데 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을 특별히 신임하였으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김창룡은 자신의 반대파를 거리낌 없이 숙청시켰다. === 한국전쟁 === 이승만과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을 눌러버리고 한반도를 통일시키기를 원했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중무기를 배치하지 않은 반면, 소련은 북한에 소련제 전투기와 탱크를 전면 배치해두고 있었다. 이렇게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이 심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서 남한을 침공하였다. 6월 26일, 이승만은 [[도쿄]]에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내려왔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이범석]]의 건의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범석]]은 비상국무회의에서 한강 철교를 폭파할 것을 안건으로 내놓았고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통과됐다.<ref>이윤영, 백사 이윤영 회고록, (집문당, 1984)</ref> 한강철교 폭파의 기안자가 누군지는 철저하게 함구되다가 관련 당사자들이 다 죽고 [[이윤영]] 목사도 죽기 전에,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자서전을 남겨놓겠다며 이를 기술하였다. 한강철교 폭파는 임시정부 출신 김홍일 중장이 지휘하였다.<ref>박경석, 오성장군 김홍일, 서문당, 1984</ref> 북한 인민군은 같은 날 새벽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유력한 설에 의하면) 한강 도하장비 부족으로 이틀을 서울에서 지체한 뒤, 30일에 [[한강]]을 건넜다. 북한군의 서울에서의 이틀간의 지체는 이후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동안 이승만은 [[부산]]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전시내각 국무위원을 증원, 보선하였으며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대한민국은 국가소멸의 위기를 넘겼다. === 재선 === [[한국전쟁]]은 이승만을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던 [[대한민국]]을 기적적으로 지켜낸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가히 대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이승만은 대통령선거 제도를 종전의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에서 직접선거 방식으로 바꾸었다. 한국전쟁 도중에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선거]](1952년) 결과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였다. === 삼선과 사임 ===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연임 제한 조항을 없애버렸고,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선거]](1956년)에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전국적인 대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리한 연임에 반발하는 국민의 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지지율을 확보해가던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 도중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70%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3선에 성공하였다. 이때 자유당은 이승만을 재출마하게 하려고 소와 말까지 동원하며 이승만 박사 재출마 청원 대회를 열었다.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우의마의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선거]](1960년)에 출마하였다. 하지만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1달 앞두고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유일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진 부통령선거에서는 [[이기붕]]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 측의 엄청난 규모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남 마산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는 의문의 실종을 당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곧 이승만은 이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자기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은 어차피 선거여부에 관련없이 당선 확정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곧 책임자인 이기붕은 당선사퇴를 고려한다 했다가 사퇴하고 물러났다.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도 바로 사퇴했다. 하지만 성난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이승만은 이 요구에 대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라고 발언하며 꽤나 쿨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4·19 혁명]]). 의외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군중은 오히려 수고했다고 박수치며 환호했다 한다. === 망명과 최후 === 그러나 민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면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부 차관은 이승만에게 하와이 요양을 권하는 형식으로 내보냈다. 민주당 신파이면서도 이승만 처벌에 반대했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에게 영감 일처리 잘했다고 했다.<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ref>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이승만을 그냥 내보냈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은 [[장면]]이 이승만을 배신했다고 공격했고, [[허정]]에게는 이승만을 요양보내게 한다면서 영원히 못돌아오게 했느냐고 따졌다.<ref>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ref>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이곳에서 생을 보내다가 [[실어증]] 등에 걸려 하와이 마우레타니아 요양원에 입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원인은 [[뇌일혈]]이었다.<ref>경향신문 1965.07.20. 1면 정치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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