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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6일 (월) 17:20 판

이명박(2010년 11월)
청계천 복원사업은 서울시장으로서 이명박의 최대 업적 중 하나였다.

이명박(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 부 오사카 시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어린시절

광복 이전인 1941년 일본 오사카 시에서 재일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며, 해방 이후에는 일가가 경북 포항시로 이주했다. 이때 당시 가족이 츠키야마란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인터넷상에서는 네티즌들이 이를 가지고 비꼬기도 한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장학금을 받고 동지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며 이후에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고려대학교 상대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에 대항한 6.3 학생운동의 주도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자 자수하여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1965년 대학 졸업 이후에는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불과 35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에 올라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 시절의 경험 덕분에 해운과 대중교통 및 건축이나 도시계획, 토건사업 등에 관심이 많다. 대통령 후보시절 그의 대표적인 공약이 한반도 대운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에 대항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정주영회장과 결별하고 현재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입당했고 얼마 후 종로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비용을 과도하게 줄여서 신고한 사실이 측근에 의해 폭로되는 바람에 의원직 상실형을 당하기 전에 먼저 의원직을 사퇴했지만 결국 혐의는 유죄가 되었다. 이후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서울시장 시절

이명박의 서울시장 당시의 대표적인 업적에는 버스체제 개편과 청계천 사업이 있다. 대중교통 개편의 목적으로 버스시스템을 GRYB[1]로 바꾸고 티머니 교통카드를 신설하였다. 이때 버스가 지하철처럼 늘어서는 등 대혼란을 빚었으나 결국에는 티머니 교통시스템은 경기도 일원으로 확대되어 거미줄처럼 이어진 발달한 교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청계 고가차도를 부수고 청계천을 부활시키는 사업을 전개했는데 미관상으로는 굉장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인공천이라는 점 때문에 청계천 사업 시작 당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아무튼, 이 두 업적은 서울시장 이명박을 스타로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 그의 대중적 주목도를 높인 것은 히딩크와의 사진촬영 사건과 수도 서울 봉헌사건이다. 히딩크 사진촬영 사건은 당시 월드컵 영웅인 거스 히딩크 감독과 서울시장의 공식적인 만남임에도 기념촬영과 사인을 위해 그의 아들이 동네 매점에 과자 사러 가듯이 슬리퍼에 츄리닝 유니폼 차림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까인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소망교회 장로출신답게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서울이 시장 사유지냐는 등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고대 디시인사이드에는 고구마장사꾼과 더불어 시장에비가 대표적인 인터넷 Meme으로 등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대통령 시절, 논란의 중심

이명박은 서울시장 때의 인기를 이어받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 박근혜라는 난적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하는데 성공했다. 7% 성장, 소득 4만 불, 세계 7대 강국이라는 "747 공약"과 한반도대운하를 내세우며 바람몰이를 하고, 노무현 정부의 레임덕과 민주당계 범여권의 혼란에 힘입어 2008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BBK 주가조작 사건에 관하여 그가 책임을 회피했다는 주장이 일었는데, 그에게 무죄가 선언되긴 하였으나 전후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의혹을 피할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역대 최저 투표율을 보임으로써 대통령 당선인임에도 다소간의 부담을 안고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영어몰입교육과 한반도대운하 공약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다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논란으로 촛불시위가 벌어지면서 반이명박 정서가 증폭되었다. 이 때문에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인파가 광화문 앞과 서울광장을 뒤덮는 등 집권 1년 차부터 엄청난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다. 또 한편으로 한나라당 내부의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친박계"에서도 "친이계"가 자신들을 배제하려 한다며 2008년 총선에서 친박연대로 한나라당 후보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1년 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말미암은 추모 정국이 형성되자, 야권으로부터 '민주화 성과를 역진하려는 반민주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신문방송겸영을 허용하는 등의 언론법 개정과 인터넷 실명인증 의무화로 인한 유튜브와의 논란 등으로 인해 정부의 언론장악 의도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언론노조는 <PD수첩>의 MBC 노조와 <돌발영상>을 만들었던 YTN 노조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언론탄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당선 당시 지지층에서조차 무리한 공약으로 여겨졌던 한반도 대운하는 2008년 촛불시위와 총선 이후 포기하게 이르렀으며, 이후 4대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부분적으로 부활시켰지만 "녹색 뉴딜"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도 불구하고 환경파괴 사업이라는 비판이 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전 정부의 경제 파탄을 심판하겠다는 의도로 제시한 747 공약은 전 세계적 경제위기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무리한 돈질로 인해 "잘못된 경제지상주의" 내지는 "오로지 전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언플용 헛공약"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4대강 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안하더라도 김대중정권 시절의 토건사업 예산 비중보다는 적다는 점은 주목받지 못한다. 더하여 4대강 사업을 제하면 토건예산이 큰 폭으로 줄어 불요한 사업은 재검토되고 있다. 경제 활성화 정책도 나름 선방은 했다는 긍정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명박 혐오"가 만연하면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 버금가는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수준의 말놀이에 가까운 정부비판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론과 겹쳐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적대감 내지는 공포감을 지나치게 고조화시킨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물가상승이나 불요한 토건사업은 이전 정권부터 계속 이루어진 것이며,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실무자가 결정하는 것이 많은데 이걸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터넷상에서는 전례 없는 넷우익-입진보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이명박(의 행동)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이명박과 그의 정치적 배경이 되는 범보수 지지층의 이미지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배경(소위 "범진보")과 많은 부분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카리스마형 지도자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이 다소 병맛나는 헛드립을 많이 치는 바람에 스스로의 신뢰를 깎아 먹은 것이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으로 확장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가져오게 하였다.

주석

  1. ^ 일부에서는 지랄염병의 머리글자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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