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편집하기

누리위키, 온 누리의 백과사전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편집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저장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1번째 줄: 1번째 줄: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3번째 왕비이자 후궁이다.
+
희빈 장씨는 [[조선]] 제 19대 왕인 [[숙종]]의 후궁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헌]]이라는 통역관이며, 남인출신이다. 어머니는 양반 [[조사석]]의 노비이다. 처음에는 궁녀로 들어와서 숙종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숙종의 눈에 반했다. 그후 숙종을 보필하게 되는 궁녀가 되다가 아들을 낳게 되자, 후궁이 되었다.
  
== 설명 ==
+
== 인현왕후 민씨와의 대립과 말년 ==
  
희빈 장씨의 이름은 옥정으로, 역관 [[장현]]의 장녀이다. 당시에 당파싸움이 심했는데, [[남인]]과 [[북인]]과의 대립이 특히 심각했다.
+
[[인현왕후]]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후 인현왕후가 쫓겨나자 왕비가 되는데, 성격이 거칠고 탐욕스러워서 숙종이 싫어하게 된다. 후에 인현왕후 민씨가 다시 복권하자 오빠 장희재과 함께 사약을 받는다.  
 
 
숙종은 당시 어머니가 [[명성왕후 김씨]]인데, 그녀는 북인이었다. 그래서 북인을 싫어했던 숙종이 장씨를 데려다가 궁녀로 지내게 했다.
 
 
 
명성왕후는 남인에 속해있던 희빈 장씨를 특히 싫어했는데, 그래서 북인의 세력에 놓여있었던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를 맞아드리게 된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숙종]]이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날, 명성왕후가 병으로 죽자, 숙종이 다시 장씨를 맞이하게 된다. 장씨가 아들을 낳게 되자 숙종은 장씨의 아들을 1살도 채 안 되어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세자를 낳은 덕택에 장씨는 후궁에서 벗어나, 왕비로 책봉하게 된다.
 
 
 
장씨는 인현왕후가 복권되자 후궁으로 다시 된다. 그 이유는 《[[인현왕후전]]》에 의하면 장씨가 너무 성격이 거칠고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성격에 있다고 한다.
 
 
 
나중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데, 그의 아들인 세자는 나중에 왕이 된다.
 
 
 
역사가의 주장으로 볼 때 《인현왕후전》에서 나오는 희빈 장씨에 대해 평가가 너무 왜곡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사사된 장씨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면 이는 장씨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희빈 장씨의 그릇된 평가와 그녀와 관련된 부정적인 인식은 요즘에 와서 다시 고치게 되는 작업을 다시 펴고 있다.
 
  
 
[[분류:조선의 인물]]
 
[[분류:조선의 인물]]

누리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라이선스로 배포된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누리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