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선거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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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대대선.jpg|400픽셀|섬네일|14대 대선 후보들의 선거벽보]]
 
 
{{대사|김영삼-김대중 라이벌 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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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주공화당]] 총재인 [[김종필]]은 충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거의 이끌어내지 못해 독자세력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신민주공화당]] 총재인 [[김종필]]은 충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거의 이끌어내지 못해 독자세력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이처럼 각기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삼당합당]]'''(1990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삼당합당은 말 그대로 세 정당을 합쳐버리는 조치로서, 삼당합당의 결과로 [[민주자유당]](현, [[새누리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탄생하였다. 김영삼은 [[부산]]-[[경남]]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는데, 삼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정의당의 연고지인 [[대구]]-[[경북]] 지역과 신민주공화당의 연고지인 [[충청]] 지역까지 자신의 표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연고의 호남 지역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버린다. 하지만 독재자와 손잡은 ‘민주투사’ 김영삼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민주자유당은 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만 바꿔가며 장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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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이처럼 각기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삼당합당]]'''(1990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삼당합당은 말 그대로 세 정당을 합쳐버리는 조치로서, 삼당합당의 결과로 [[민주자유당]](현, [[새누리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탄생하였다. 김영삼은 [[부산]]-[[경남]]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는데, 삼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정의당의 연고지인 [[대구]]-[[경북]] 지역과 신민주공화당의 연고지인 [[충청]] 지역까지 자신의 표밭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연고의 호남 지역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버린다. 하지만 독재자와 손잡은 ‘민주투사’ 김영삼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민주자유당은 이후 영남 지역의 표밭을 등에 업고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만 바꿔가며 장수하게 된다.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은 3당합당을 강력하게 비난하였으며, 통일민주당 내에서 삼당합당에 반대하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창당(1991년 9월)하였다.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은 3당합당을 강력하게 비난하였으며, 통일민주당 내에서 삼당합당에 반대하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창당(1991년 9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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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의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삼당합당으로 여당 프리미엄과 영남+충청 유권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은 확실히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김영삼은 안정 속의 개혁, 강력한 정부와 대통령, 한국병 해소 등을 앞세우며 '''신한국'''을 비전으로, '''신한국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 지역의 정치적 고립이라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김대중은 김영삼을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한편, 대화합의 정치, 지역 차별 해소 등을 약속하였다. 여당과 야당의 교체를 의미하는 '''이번에는 바꿉시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한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신화를 재현하겠다면서 사업가 출신인 자신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경제와 통일을 책임질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핵심 공약으로는 주택문제를 겨냥한 '''반값아파트'''를 제시하였고, 이 공약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정주영의 슬로건은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이다. 정주영은 [[경남]] [[울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주영의 돌풍은 영남지역의 보수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재벌인 정주영을 밀어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정주영은 진보표는 건드리지 않고 보수표만 흡수했다. 이에 따라 김영삼도 더 이상 대통령선거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의 3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삼당합당으로 여당 프리미엄과 영남+충청 유권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김영삼]]은 확실히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김영삼은 안정 속의 개혁, 강력한 정부와 대통령, 한국병 해소 등을 앞세우며 '''신한국'''을 비전으로, '''신한국 창조'''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반면 김대중은 호남 지역의 정치적 고립이라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김대중은 김영삼을 변절자라고 비난하는 한편, 대화합의 정치, 지역 차별 해소 등을 약속하였다. 여당과 야당의 교체를 의미하는 '''이번에는 바꿉시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한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신화를 재현하겠다면서 사업가 출신인 자신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경제와 통일을 책임질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핵심 공약으로는 주택문제를 겨냥한 '''반값아파트'''를 제시하였고, 이 공약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정주영의 슬로건은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이다. 정주영은 [[경남]] [[울산]]을 연고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주영의 돌풍은 영남지역의 보수표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재벌인 정주영을 밀어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정주영은 진보표는 건드리지 않고 보수표만 흡수했다. 이에 따라 김영삼도 더 이상 대통령선거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선거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이 [[부산]]의 어느 복요리 식당에서 발생한다.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온 1992년 12월 11일, ‘초원복집’에는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과 부산직할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부산직할시 교육감 등의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한 전략을 의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지역감정을 부추길 필요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정주영 후보 측에서 몰래 설치한 녹음기에 의해 모두 기록되고 있었고, 정주영 후보측에서는 선거판을 막판에 뒤흔들어보려는 속셈으로 이 녹취록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하지만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국민들은 이 녹취록의 내용보다, 정주영 후보측에서 '''불법 도청'''을 감행하였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였다. 결국 정주영 후보는 역풍을 맞았고, 정주영과 김영삼으로 분열될뻔한 영남지역 표는 김영삼으로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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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거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이 [[부산]]의 어느 복요리 식당에서 발생한다.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온 1992년 12월 11일, ‘초원복집’에는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과 부산직할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부산직할시 교육감 등의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한 전략을 의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서는 지역감정을 부추길 필요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다. 이들의 발언은 정주영 후보 측에서 설치한 녹음기에 의해 모두 기록되고 있었고, 정주영 후보측에서는 선거판을 막판에 뒤흔들어보려는 속셈으로 이 녹취록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하지만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국민들은 이 녹취록의 내용보다, 정주영 후보측에서 '''불법 도청'''을 감행하였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였다. 결국 정주영 후보는 역풍을 맞았고, 정주영과 김영삼으로 분열될뻔한 영남지역 표는 김영삼으로 집중되었다.
  
 
=== 선거 광고 ===
 
=== 선거 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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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대선그래프.jpg|500픽셀|섬네일|center|14대 대선 지역별 득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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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합당으로 인해 김대중의 유일한 연고지가 되어버린 호남지역에서는 90%내외(광주 96%, 전남 92%, 전북 89%)의 사기급 득표율로 김대중을 밀어주었고 호남 출신 이주자가 많은 서울에서도 38%득표율로 선전하였으나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고르게 높은 득표율을 확보하면서 김영삼이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김영삼]]-[[김대중]] 라이벌 매치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 김영삼은 [[삼당합당]]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유일한 연고지인 [[호남]]과 호남 이주민이 많은 [[서울]]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하였다.
 
 
 
* '''수도권''': 호남 출신 이주민이 많은 서울에서는 김대중이 근소한 차로 다득표에 성공하였지만 지난 선거에서 노태우와 김영삼을 지지하던 인천과 경기에서는 김영삼을 밀어주면서 수도권 판세는 김영삼이 가져가게 된다.
 
* '''영남''': 김영삼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지역에서는 김영삼을 크게 밀어주었고(부산 73%, 경남 72%), 본래 노태우의 연고지였던 대구-경북지역도 삼당합당으로 인해 김영삼의 연고지가 되었다(대구 60%, 경북65%). 이 선거를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져있던 영남은 보수진영의 가장 든든한 표밭이 된다. [[초원복집사건]]으로 인해 타 지역과 달리 보수표가 김영삼과 정주영으로 분열되지 않고 김영삼에 집중되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보수진영의 필승전략이 된다.
 
* '''호남''': 3당합당으로 인해 김대중의 유일한 연고지가 되어버린 호남지역에서는 90(광주 96%, 전남 92%, 전북 89%)의 사기급 득표율로 김대중을 밀어주었다. 하지만 영남의 1/2 수준인 호남인구로는 영남을 이길 수 없었다.
 
* '''충청''': 원래 [[김종필]]연고지었던 충청지역은 3당합당으로 인해 [[김영삼]]의 연고지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김영삼은 충청지역에서의 다득표를 확보하게 된다.
 
* '''강원''': 전통적인 보수 지역인 강원도에서는 김영삼과 더불어 정주영이 선전을 거두었다. 정주영이 강원에서 34%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선전한 이유는 '민주투사' 김영삼보다 '재벌회장' 정주영이 더 보수 색체가 강하기 때문이다.
 
  
 
== 선거 이후 ==
 
== 선거 이후 ==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군부’출신이 아닌 ‘민간인’출신의 대통령의 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이름을 [[문민정부]]로 지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과감한 재벌개혁 등 대한민국의 진정한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려 힘썼다.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12·12 쿠데타]]의 주범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남북관계를 개선시켰으며, '''일본의 버르장버리를 고쳐놓겠다'''고 외치며, 일본의 침략야욕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한때 김영삼의 지지율은 90%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정권 말기에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그동안의 공적들을 모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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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군부’출신이 아닌 ‘민간인’출신의 대통령의 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이름을 [[문민정부]]로 지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5년 임기동안 대한민국의 진정한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려 힘썼다.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12·12 쿠데타]]의 주범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남북관계를 개선시켰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한때 김영삼의 지지율은 90%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정권 말기에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그동안의 공적들을 모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김대중은 선거 다음날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 패배를 겸허하게 인정하였다. 지난 두 번의 대통령선거([[1971년 대통령선거]],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부정선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다만 일부 국민들은 [[초원복집사건]]이 벌어졌던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 관건선거로 정의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일반 시민이 되겠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김대중은 지지자들과 정치계 인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결정을 확고히 하려는 뜻에서 [[영국]]으로 떠난다. <del>그런데 다음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읭?</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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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선거 다음날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 패배를 겸허하게 인정하였다. 지난 두 번의 대통령선거([[1971년 대통령선거]],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부정선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또한, 김대중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일반 시민이 되겠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김대중은 지지자들과 정치계 인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결정을 확고히 하려는 뜻에서 [[영국]]으로 떠난다. <del>그런데 다음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읭?</del>
  
 
김영삼에 붙어 한 자리 해먹어보려던 [[김종필]]은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 마찰을 빚다가 끝내 사퇴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김영삼에 붙어 한 자리 해먹어보려던 [[김종필]]은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 마찰을 빚다가 끝내 사퇴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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