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선거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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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대선그래프.jpg|500픽셀|섬네일|center|14대 대선 지역별 득표수]] | [[파일:14대선그래프.jpg|500픽셀|섬네일|center|14대 대선 지역별 득표수]] | ||
− | + | 3당합당으로 인해 김대중의 유일한 연고지가 되어버린 호남지역에서는 90%내외(광주 96%, 전남 92%, 전북 89%)의 사기급 득표율로 김대중을 밀어주었고 호남 출신 이주자가 많은 서울에서도 38%의 득표율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영남]] 지역에서는 초원복집사건의 영향으로 [[김영삼]]이 정주영 후보를 제치고 60~70%내외의 높은 득표율을 독식할 수 있었다. 득표율 자체로만 보면 영남의 결집력이 호남의 결집력보다 떨어지지만, 영남의 인구 자체가 호남보다 많기 때문에 김영삼은 영남 하나만으로 호남에서의 실표를 모두 커버할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고르게 높은 득표율을 확보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김영삼이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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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이후 == | == 선거 이후 == | ||
− |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군부’출신이 아닌 ‘민간인’출신의 대통령의 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이름을 [[문민정부]]로 지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 + |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군부’출신이 아닌 ‘민간인’출신의 대통령의 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 이름을 [[문민정부]]로 지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5년 임기동안 대한민국의 진정한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려 힘썼다.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12·12 쿠데타]]의 주범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남북관계를 개선시켰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한때 김영삼의 지지율은 90%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정권 말기에 터진 [[IMF 구제금융사태]]는 그동안의 공적들을 모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
− | 김대중은 선거 다음날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 패배를 겸허하게 인정하였다. 지난 두 번의 대통령선거([[1971년 대통령선거]],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부정선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 + | 김대중은 선거 다음날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선거 패배를 겸허하게 인정하였다. 지난 두 번의 대통령선거([[1971년 대통령선거]],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부정선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또한, 김대중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일반 시민이 되겠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김대중은 지지자들과 정치계 인사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신의 결정을 확고히 하려는 뜻에서 [[영국]]으로 떠난다. <del>그런데 다음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읭?</del> |
김영삼에 붙어 한 자리 해먹어보려던 [[김종필]]은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 마찰을 빚다가 끝내 사퇴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 김영삼에 붙어 한 자리 해먹어보려던 [[김종필]]은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 마찰을 빚다가 끝내 사퇴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