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선거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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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경제대통령 이명박}}
 
{{대사|경제대통령 이명박}}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선거'''는 [[대한민국]]에서 2007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에는 10년 만에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초로 전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는 도중에 치러졌다. 투표율은 62.9%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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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선거'''는 [[대한민국]]에서 2007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에는 10년 만에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명박은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초로 전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는 도중에 치러졌다. 투표율은 62.9%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 배경 ==
 
== 배경 ==
 
=== 고건의 대선 불출마 선언 ===
 
=== 고건의 대선 불출마 선언 ===
임기 말의 노무현 정권은 국민들에게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한때 5%까지 곤두박질쳤으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지방선거]] 참패로 폭삭 망해버렸고, 망조를 느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열린우리당을 줄줄이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여당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물의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었다(1997년 이회창 같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고건은 [[노무현]]이 탄핵 소추(2004년 3월)되어 대통령 권한을 상실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대리 수행하였는데, 혼란한 정국에서도 침착하게 국정을 운영하면서 '''대통령보다 더 낫다'''는 평을 받게 된다. 고건은 전두환 정권 때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여러 정권을 거쳐 장관과 총리직을 맡아온 '''행정의 달인'''이다.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청렴함, 그리고 안정된 국정 운영으로 명성을 확보한 고건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박근혜]]를 제치고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일삼는 고건 총리를 매우 싫어했고, 고건 총리 기용에 대해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며 악평을 내렸다(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고건은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 탓”'''이라며 정면 반박하였다. 결국 이를 계기로 노무현에 완전히 질려버린 고건은 노무현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차기 대선에도 불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했다(2007년 1월). 이렇게 여당은 여당의 마지막 희망을 놓쳐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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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은 거듭되는 실정으로 국민들에게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한때 5%까지 곤두박질쳤으며, ‘대통령 까기’가 대국민 스포츠가 되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지방선거]] 참패로 폭삭 망해버렸고, 곧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지면서 망조의 조짐을 보였다. 여당이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물의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었다(1997년 이회창 같은).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인물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고건은 [[노무현]]이 탄핵 소추(2004년 3월)되어 대통령 권한을 상실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대리 수행하였는데, 혼란한 정국에서도 침착하게 국정을 운영하면서 '''대통령보다 더 낫다'''는 평을 받게 된다. 고건은 전두환 정권 때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여러 정권을 거쳐 장관과 총리직을 맡아온 '''행정의 달인'''이다.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청렴함, 그리고 안정된 국정 운영으로 명성을 확보한 고건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박근혜]]를 제치고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일삼는 고건 총리를 매우 싫어했고, 고건 총리 기용에 대해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며 악평을 내렸다(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고건은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따돌림 당한 것은 오만과 독선, 무능력 '''이라며 정면 반박하였다. 결국 이를 계기로 노무현에 완전히 질려버린 고건은 노무현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차기 대선에도 불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했다(2007년 1월). 이렇게 여당은 여당의 마지막 희망을 놓쳐버리게 된다.  
  
 
=== 이명박과 박근혜의 등장 ===
 
=== 이명박과 박근혜의 등장 ===
제1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2번의 대선을 거치며 이미지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이회창]]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2004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으로 인해 당이 망할 위기에 처했으나, [[박근혜]]가 당대표로 나서서 한나라당을 전두 지휘한 결과 [[제17대 총선]]에서 제1당 자리는 [[열린우리당]]에게 내주었지만 121석을 확보하면서 예상외의 선전을 거두었다. 이 선거에서 등장한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지금까지도 한나라당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근혜는 이 선거를 계기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력 차기 대선후보로 떠오르게 된다. 2006년의 [[제4회 지방선거]]에서도 박근혜의 활약 속에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광역자치단체장 자리를 독식하면서 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유세를 다니던 도중 박근혜 대표가 괴한의 '''커터칼 테러'''를 당하고 수술 끝에 병원에서 깨어난 직후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을 물어본 에피소드 역시 박근혜의 명성을 드높였다. 한편, [[이명박]]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시장직을 맡으며 [[청계천]] 복원, 4색 버스체계 도입, 버스환승제도 개선, 중앙버스차로 도입 등으로 서울시민들에게 신임을 쌓으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를 중심으로 계파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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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2번의 대선을 거치며 이미지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이회창]]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었다. 2004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으로 [[17대 총선]]을 앞두고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으나, [[박근혜]]가 당대표로 나서서 선거를 전두 지휘한 결과 한나라당은 제1당 자리는 [[열린우리당]]에게 내주었지만 121석을 확보하면서 예상외의 선전을 거두었다. 이 당시 등장한 한나라당의 '''천막당사'''는 지금까지도 한나라당의 전설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근혜는 이 선거를 계기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유력 차기 대선후보로 떠오르게 된다. 2006년의 [[제4회 지방선거]]에서도 박근혜의 활약 속에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광역자치단체장 자리를 독식하면서 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유세를 다니던 도중 박근혜 대표가 괴한의 '''커터칼 테러'''를 당하고 수술 끝에 병원에서 깨어난 직후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을 물어본 에피소드 역시 박근혜의 명성을 드높였다. 한편, [[이명박]]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시장직을 맡으며 [[청계천]] 복원, 4색 버스체계 도입, 버스환승제도 개선, 중앙버스차로 도입 등으로 서울시민들에게 신임을 쌓으며 차기 대통령 후보로 급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를 중심으로 계파가 형성되었다.  
  
 
== 전개 ==
 
== 전개 ==
===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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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2006년의 [[제4회 지방선거]]를 계기로 폭삭 망해버렸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열린우리당에서 탈출한 피난민을 비롯한 민주당계 인사들은 [[대통합민주신당]](8월 5일 창당)을 중심으로 재결합하게 된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어떻게든 ‘실패한 대통령’ 노무현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은 별 영양가 없는 떨거지들의 오합지졸 집합소에 불과했고, 참신하고 명망 있는 인물이 없었다. 경선에서는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등이 등장하여 도토리 키재기 싸움을 벌인 끝에 [[MBC]]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의 정동영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2007년 10월 14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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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인 [[열린우리당]]은 2006년의 [[제4회 지방선거]]를 계기로 폭망해버렸고,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열린우리당에서 탈출한 피난민을 비롯한 민주당계 인사들은 [[대통합민주신당]](8월 5일 창당)을 중심으로 재결합하게 된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어떻게든 노무현의 이미지를 씻어버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은 별 영양가 없는 떨거지들의 오합지졸 집합소에 불과했고, 무엇보다도 [[고건]] 같은 참신하고 명망 있는 인물이 없었다. 경선에서는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등이 등장하여 도토리 키재기싸움을 벌인 끝에 [[MBC]]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의 정동영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2007년 10월 14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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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
 
===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
오합지졸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과 달리,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는 유력한 대선 후보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었다.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과 선거의 여왕 [[박근혜]]는 당 내에서 큰 계파를 이끌며 상당한 입지를 쌓아 놓고 있었다. 이명박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공약 등 경제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공약을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의 도곡동 땅 논란, BBK 주가조작 논란 등을 문제삼으며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을 비난하였다(박근혜: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이명박: '''“여러분,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이거 다아아아아↗↗↗↗↗ 거짓말이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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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지졸들의 모임 대통합민주신당과 달리,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는 유력한 대선 후보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었다.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과 선거의 여왕 [[박근혜]]는 당 내에서 큰 계파를 이끌며 상당한 입지를 쌓아 놓고 있었다. 이명박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공약 등 경제살리기에 초점을 맞춘 공약을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의 도곡동 땅 논란, BBK 주가조작 논란 등을 문제삼으며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을 비난하였다(박근혜: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이명박: '''“여러분,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이거 다아아아아↗↗↗↗↗ 거짓말이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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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열한 경선 끝에,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당내 입지가 더 강했던 [[박근혜]]가 승리했지만,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서울시장직을 맡으며 대국민적인 인기를 끌던 [[이명박]]이 승리하면서 이명박이 득표율 1.5%차로 근소하게 승리를 거두었다(8월 21일). 박근혜 후보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돕는 데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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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열한 경선 끝에,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당내 입지가 더 강했던 [[박근혜]]가 승리했지만,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서울시장직을 맡으며 대국민적인 명성을 쌓은 [[이명박]]이 승리하면서 이명박이 득표율 1.5%차로 근소하게 승리를 거두었다(8월 21일). 박근혜 후보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돕는 데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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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후보가 [[이명박]]으로 정해진 직후인 9월 20일의 여론조사에서는 각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이명박 50.6%, 정동영 8.5%, 손학규 4.8%, 문국현 3.3%'''로 나타나며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가 점쳐졌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가 [[정동영]]으로 정해진 직후인 10월 16일의 여론조사에서도 '''이명박 51.9%, 정동영 20.2%, 문국현 8.7%, 권영길 3.6%, 이인제 3.3%''' 등으로 이명박의 압승이 점쳐졌다.  
 
한나라당의 후보가 [[이명박]]으로 정해진 직후인 9월 20일의 여론조사에서는 각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이명박 50.6%, 정동영 8.5%, 손학규 4.8%, 문국현 3.3%'''로 나타나며 이명박의 압도적인 승리가 점쳐졌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가 [[정동영]]으로 정해진 직후인 10월 16일의 여론조사에서도 '''이명박 51.9%, 정동영 20.2%, 문국현 8.7%, 권영길 3.6%, 이인제 3.3%''' 등으로 이명박의 압승이 점쳐졌다.  
  
선거는 걸리버와 난쟁이가 싸우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여당 후보 정동영은 여당 프리미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이명박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은 '''747공약'''(연 7%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 불, 세계 7위 경제대국), '''한반도 대운하 공약'''등 파격적인 경제 관련 공약들을 내걸고 세금 감면과 규제 철폐를 통한 투자 활성화를 약속하였다. 반면, 비전도 희망도 없던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도덕성을 공격(BBK 주가조작 논란, 도곡동 땅 투기 논란)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내걸며 이명박을 헐뜯는데에만 치중하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도덕성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던 당시 시국에는 별로 먹혀들어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만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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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걸리버와 난쟁이가 싸우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여당 후보 정동영은 여당 프리미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이명박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은 '''747공약'''(연 7%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 불, 세계 7위 경제대국), '''한반도 대운하 공약'''등 파격적인 경제 관련 공약들을 내걸고 세금 감면과 규제 철폐를 통한 투자 활성화를 약속하였다. 반면, 비전도 희망도 없던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도덕성을 공격(BBK 주가조작 논란, 도곡동 땅 투기 논란)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내걸며 이명박을 헐뜯는데에만 치중하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도덕성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하던 당시 시국에는 별로 먹혀들어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만을 샀다.  
  
 
=== 이회창의 대선 출마 ===
 
=== 이회창의 대선 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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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광고 ===
 
=== 선거 광고 ===
 
*이명박 후보의 CF (욕쟁이할머니 편)
 
*이명박 후보의 CF (욕쟁이할머니 편)
이명박 후보의 CF는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욕쟁이 국밥 할머니의 입을 통해 국정은 돌보지 않고 당파싸움에만 치중하는 여당을 세련된 방법으로 비난하고, 경제 살리기에 대한 국민들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del>먹는 모습 하나만큼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이다.</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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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후보의 CF는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욕쟁이 국밥 할머니의 입을 통해 국정은 돌보지 않고 당파싸움에만 치중하는 여당을 세련된 방법으로 비난하고, 경제 살리기에 대한 국민들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del>먹방 하나만큼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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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결과 ==
 
== 선거 결과 ==
<del>사실상 한나라당 경선이 대통령 선거</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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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이후 ==
 
== 선거 이후 ==
[[이명박]]이 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명박정부]](실용정부)를 출범시켰다. 작은 정부, 시장경제체제를 기본 이념으로 경제살리기에 노력을 쏟았다.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 회복을 보여주며 경제는 상당히 선방하였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은 국민들의 반발을 감안하여 백지화되고,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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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명박정부]](실용정부)를 출범시켰다. 작은 정부, 시장경제체제를 기본 이념으로 경제살리기에 노력을 쏟았다.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어려운 상황에도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 회복을 보여주며 경제는 상당히 선방하였다. 하지만 2008년에는 [[광우뻥 사태]]가 벌어지면서 지지율이 7%까지 떨어지기도 하였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은 국민들의 반발을 감안하여 백지화되고,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대체되었다.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 및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인사들을 견제하며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 및 한나라당 내 친이명박계 인사들을 견제하며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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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콩가루 집안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참패 이후 급속도로 와해되어갔다. '''이게 다 친노세력 때문이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친노세력은 내쫓겨났고, 민주당 쪽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2008년 2월)을 결성하게 된다. [[정동영]]은 애초에 대통령이 될 자질이 없었다는 평을 받아 당내 입지가 줄어들었다. [[제18대 총선]](2008년)에서는 서울 동작구에 출마하였으나 [[정몽준]]에게 패하는 굴욕을 다시 맛보았다.
  
애초부터 콩가루 집안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참패 이후 급속도로 와해되어갔다. '''이게 다 친노세력 때문이다'''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친노세력은 쫓겨났고,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을 결성(2008년 2월)하게 된다. [[정동영]]은 애초에 대통령이 될 자질이 없었다는 평을 받아 당내 입지가 줄어들었다. [[제18대 총선]](2008년)에서는 서울 동작구에 출마하였으나 [[정몽준]]에게 패하는 굴욕을 다시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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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이명박 대통령을 좌파적이라고 비난하며 정통 우익 보수를 표방하는 [[자유선진당]]을 창당(2008년 2월)하였다. 자유선진당은 충청도를 정치적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이회창]]은 이명박 대통령을 좌파적이라고 비난하며 정통 우익 보수를 표방하는 [[자유선진당]]을 창당(2008년 2월)하였다. 자유선진당은 충청도를 정치적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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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후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들 중, 유일하게 부정선거 논란이 벌어지지 않은 선거가 되었다. 워낙 표차가 크게 벌어진 터라, 부정선거 운운하는 거 자체가 의미 없는 헛수고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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