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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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llang|ko-Hani|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줄여서 '''미군정'''(기)라 부르는 이 시기는 38°선 남쪽의 [[한반도]]를 [[미국]]이 대신 통치하던 시기였다. 1945년 9월 8일 시작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선포되면서 끝났다. 현대 대한민국이 출범하기에 앞선 준비단계였다. |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llang|ko-Hani|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 줄여서 '''미군정'''(기)라 부르는 이 시기는 38°선 남쪽의 [[한반도]]를 [[미국]]이 대신 통치하던 시기였다. 1945년 9월 8일 시작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선포되면서 끝났다. 현대 대한민국이 출범하기에 앞선 준비단계였다. | ||
− | 미군정 시기의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만연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마저 갑작스레 이념이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된 것이 이러한 혼란의 일차적 원인이 되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약 40만 명의 피란민과 해방 소식을 듣고 해외에서 돌아온 귀국자들은 사회 혼란을 부채질하였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 + | 미군정 시기의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만연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마저 갑작스레 이념이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된 것이 이러한 혼란의 일차적 원인이 되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약 40만 명의 피란민과 해방 소식을 듣고 해외에서 돌아온 귀국자들은 사회 혼란을 부채질하였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친일파들을 다시 주요 관직에 배치하여 대중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
게다가 미군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문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 내의 여러 복잡한 사회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정치는 이 시기동안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우익]]과 [[좌익]] 사회단체들이 결성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미군정에서는 좌익을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반공주의]]를 지지하던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인사들이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운형]]를 비롯한 중도계열은 남북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며 '''[[좌우합작운동|좌우익 대립에서 벗어나 민족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노력 역시도 좌절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남한 단독의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서 남북 분단이 영구화되는 결과를 제공하였다. | 게다가 미군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나 문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한국 내의 여러 복잡한 사회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정치는 이 시기동안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우익]]과 [[좌익]] 사회단체들이 결성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으나 미군정에서는 좌익을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반공주의]]를 지지하던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인사들이 정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운형]]를 비롯한 중도계열은 남북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며 '''[[좌우합작운동|좌우익 대립에서 벗어나 민족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이러한 노력 역시도 좌절되었다. 결국 미군정은 남한 단독의 총선거를 실시함으로서 남북 분단이 영구화되는 결과를 제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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