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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ref>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ref>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ref>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ref>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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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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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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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2015년 10월 18일 (일) 20:26 판

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1] 독립운동 세력에 호의나 동정심을 보였던 윤치호나 자치권, 참정권을 얻자던 이규완, 민원식과 달리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였다.

생애

본관이 반남박씨인지 밀양박씨인지 불분명하다. 아버지는 양주군 주내면에서 남의 집 머슴노릇을 했다. 1897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토쿄 청산학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1900년 졸업하고 바로 동경부기학교로 진학했다. 동경 부기학교에서는 은행, 부기업무를 배웠으며, 동경부기학교 재학 중 동경 경찰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참관하였다. 1903년 동경부기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때마침 박중양이 중학교 과정을 배울 때, 박영효가 망명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 보낸 스파이들이 박중양의 뒤를 미행했고, 김옥균의 부관참시에 충격을 받았던 그는 국비로 유학보내놓고 자신을 미행하는 대한제국에 대해 애정을 버렸다.

1905년 농상공부의 공무원이 되고, 1906년에는 군부 기사, 군부 군기창 기사를 지냈지만 그만두었다. 러일전쟁 당시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통역관으로 다녀왔으며, 다시 유학을 결심했다가 실패하고 의친왕의 일본 수행원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주석

  1. ^ 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