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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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朴重陽,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구한 말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소신형 친일파였다. 자신의 출세나 영달보다는 소신형 친일파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생이며 한때 이토의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중양은 그분은 나의 스승이지 아버지는 아니라고 했다.[1]

진주판관,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8월에는 충청남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한일 합방 이후에도 충청남도 장관이 되고, 황해도지사와 충청북도지사까지 지냈다.

뇌물과 여색을 밝히지 않아 조선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지만, 1925년 속리산에 갔다가 만취상태에서 속리산 여승을 추행하여 자살하게 만들면서 위신이 손실됐다. 그뒤로 휴직계 냈다가 사퇴하지만 1928년 잠깐 황해도지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과 독립운동가들을 조롱했고,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끌려가자 최남선, 이광수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했고, 장헌식은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으며, 최린은 눈물을 흘렸지만, 박중양은 이완용이 국민을 구했으며, 총독부의 통치는 관대했다고 재판관들에게 호통을 쳐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로 대구 침산에서 유지노릇을 하며 경북도지사로 오는 인물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박중양은 이승만, 이시영, 함태영을 실명으로 지목하며 가짜 애국자라며 조롱했다. 분노한 이승만은 박중양을 처리하려 했고, 오히려 박중양은 이승만이 미군 떠나면 짐싸서 도망치느라 바쁠 것이라 조롱했다. 이승만은 사람을 보내 박중양을 정신병원에 수감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중양은 도망쳤다 한다. 그러다 1957년에 붙잡혀 소주영 정신과에 가서 정신과 상담까지 받게 된다. 1959년에 과로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1. ^ 현암조상원추모문집간행위원회, 현암 조상원 (현암사, 2001) 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