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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한일관계'''({{llang|ko-Hani|韓日關係}})는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사이의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한일관계'''({{llang|ko-Hani|韓日關係}})는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 사이의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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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
 
== 근대 ==
=== 개항기 ===
 
 
1854년, 일본은 [[미국]]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개항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일본에서 200년간 지속된 쇄국정책이 끝나고,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발 빠르게 근대화에 나섰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본 일본은 우리도 빨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겠다는 위기를 느끼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변화에 나선 것이다. 그에 비하여 보수적인 유학자 위주의 조선에서는 여전히 중국만이 최고이고, 다른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라고 여기면서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1854년, 일본은 [[미국]]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개항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일본에서 200년간 지속된 쇄국정책이 끝나고,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발 빠르게 근대화에 나섰다.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본 일본은 우리도 빨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겠다는 위기를 느끼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변화에 나선 것이다. 그에 비하여 보수적인 유학자 위주의 조선에서는 여전히 중국만이 최고이고, 다른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라고 여기면서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근대화에 성공하여 서양 국가로 변모한 일본은 다른 서양 국가들을 따라서 제국주의적 행보를 시작한다. 그 시작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1876년)이다. 이 조약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 측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고,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권, 외교권, 군사권을 차례로 잠식해갔으며 1910년에는 아예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일본제국에 병합시켰다.
 
근대화에 성공하여 서양 국가로 변모한 일본은 다른 서양 국가들을 따라서 제국주의적 행보를 시작한다. 그 시작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1876년)이다. 이 조약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 측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고,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권, 외교권, 군사권을 차례로 잠식해갔으며 1910년에는 아예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일본제국에 병합시켰다.
 
=== 일제강점기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인의 대일감정은 크게 악화되었고, 이 때 생긴 반일감정은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리잡고 있다. 반일감정이 생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다. 일본제국은 중요한 식량작물인 [[쌀]]을 한반도에서 수탈하여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로 인하여 쌀값이 폭등하여 많은 한국인이 굶주리게 되었다. 일본제국의 수탈 때문에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 한국인들은 당연히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서는 한국과 달리 반일감정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제국이 대만에서는 생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상품인 [[금]]을 주로 수탈해 가져갔다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요인이다. 한국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로 1,000년이 넘는 가까운 역사시대 동안 일본과는 분리된 독자적인 역사를 가졌다. 이 시기 대부분 동안 한국은 일본을 중국의 선진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한 변방의 미개한 오랑캐로 인식해왔다. 이러한 인식은 실제로는 일본의 경제력이 조선을 넘어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런 오랑캐 국가가 선진적인 문명과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을 지배한다는 것은 한국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 
 
 
이렇게 쌓여가던 반일감정은 1919년, [[3.1 운동]]을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3.1 운동은 시민 주도의 전국적 독립 요구 운동으로서, 당시 조선 인구의 6.3%에 해당하는 106만 명이 참여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시민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3.1 운동에 크게 충격받은 일본제국은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여 조선인의 마음을 달래려 애썼다.
 
 
=== 태평양 전쟁 ===
 
1941년,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를 기습 공격한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제국은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따라서 일본 제국은 일본 본토의 일본인뿐만 아니라 식민 치하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강제 동원을 실시하였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 등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거나, 병력으로 차출되어 전장에서 아까운 목숨을 버려야 했다. 또한, 한국 여성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시켜 자국 군인의 성욕 처리반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 제국 군부의 권력 욕심으로 벌어진 무의미하고 무모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당사자라고 할 수도 없는 한국인들이 이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르면서 반일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드러난 반일감정은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며, 많은 부분이 여전히 양국간 중요한 논제로 남아 있다.
 
 
== 현대 ==
 
=== 이승만 정부 ===
 
태평양 전쟁의 결과 일본 제국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1945년)함으로서,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등 2개의 정부가 동시에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었다(1948년). 1950년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을 겪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산 세력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한국]]-[[미국]]-[[일본]]의 3각 공조가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3각 공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과 일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어떻게든 한일관계를 정상화 시키려고 애썼으나, 한국인의 반일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일본과는 선을 그으며 한미일 공조에 파열음을 냈다.
 
 
=== 박정희 정부 ===
 
{{인용문|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박정희 전 대통령|대일국교정상회담 국민담화문 中}}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추구한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부와 달리 실리적인 대일 외교를 펼쳤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반일 감정에 부응하여 반일 외교를 펼치는 것보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것을 우선시하였다. 여기에 한일관계 개선을 원했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양국 사이에 개입, 중재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에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일 양국간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한일수교와 함께 타결된 청구권 협정의 결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미화 3억 불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2억 불을 유상 차관의 형태로 받게 되었다. 이 자금은 [[포항제철]] 건설, [[소양강 댐]]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사용되어 한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은 여전히 극에 달한 상황이어서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다([[6·3 항쟁]]). 민족적 자존심을 돈에 팔아먹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까지 선포해야 했다. 한편, 이 협정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 또한 냉담했다. 일본은 한국과의 수교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음에도 미국의 요구에 의해 억지로, 그것도 한국에 막대한 청구금까지 지불해 가면서까지 수교를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자국민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청구권에 대하여 각각 다른 해석을 내렸다. 한국은 청구권이 "불법적인 식민 지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배상금"이라고 자국민에게 설명했다. 반면, 일본은 청구권이 "독립축하금" 이며 "한일간의 경제 협력을 위한 자금"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이후 또 다른 한일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 전두환 정부 ===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두환 정부 시대에 들어서도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여전히 거셌으나, 정부 차원에서의 관계 개선은 상당부분 이루어졌다. 1983년에는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였고, 여기서 한국은 40억 달러 규모의 한일 안보협력 차관을 제공받았다. 그 답례로 1984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당시 [[히로히토 천황]]은 과거사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인용문|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히로히토 천황|전두환 대통령 방일 당시 만찬사 中}}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한일간의 경제, 안보 협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전두환과 함께 이러한 한일 협력을 이루어 낸 야스히로 총리는 실상 우익적인 인물로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시작된 것도,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면 정권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 한 전두환은 이러한 문제를 숨기기 급급했다.
 
 
=== 김영삼 정부 ===
 
1990년대 들어서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적 발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 결과 한일관계는 과거의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해묵은 국민 감정과 한일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화두로 떠올랐다. [[일제강점기]] 시기가 한국에게 도움이 되었다거나, [[일본군 위안부]]가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망언은 1990년대 들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이런 말이 나와도 한국 정권에서 정보를 통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민주화가 되면서 한국인들이 일본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일본에 대한 강경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정점을 찍은 것이 일명 '버르장머리' 발언이었다.
 
 
{{인용문|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김영삼 전 대통령|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 방한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당찬 발언과는 달리, 1997년 말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한-일의 전세는 역전되었다. 1998년, 경제위기에 빠진 한국을 향해 일본은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 선언하였다. 한일 어업협정은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체결된 것으로, 한국 측에 비교적 유리한 협정이어서 일본은 이 협정을 다시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따라서, 일본의 일반적 한일 어업협정 파기는 한국이 위기에 놓여 혼란한 틈을 타 뒷통수를 후리는 도적놈같은 행동이라 할 수 있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 ===
 
김대중 정부는 반일감정을 청산하고 한일관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 게이조]] 일본 총리는 일명 [[김대중-오부치 선언]](정식 명칭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하며 양국의 우호협력 결의를 다졌다.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밝히며 역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2002년에는 [[2002 한일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로 이뤄지면서 한일관계는 대한민국 역사상 좋은 상태가 되었다.
 
 
{{인용문|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민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한일간의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음성적으로만 수입되던 일본산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 개방 정책은 시행 초기에 많은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일본의 문화가 한국에 쏟아져 내려오면 한국이 일본의 문화적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우려부터, 한민족 문화가 말살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까지 다양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정작 한일 문화개방은 한국보다 일본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겨울연가]]> 등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이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며 [[한류]]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의 문화가 해외로 수출되어 성공한 첫 사례로서, 이후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일본 대중은 한국을 전쟁 국가, 독재 국가로만 인식해왔는데,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 반면, 일본 문화는 한국에서 마이너한 취미 정도로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한국 문화계는 그동안 일본의 게임이나 영화, 음악을 베껴오며 안일하게 처신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됨으로서 오히려 한국 고유의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 뒤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국민은 서로의 문화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 2012년 이후 ===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일관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양호하게 유지되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기에 접어든 2012년을 계기로 크게 악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일관계는 2012년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2012년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 출생이기도 하고, 이명박 정부는 친일 정권이라는 비판이 있었을 만큼 정권 초기부터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임기 4년차인 2012년 들어 친인척 비리가 드러나고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며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이 가속화 되었는데, 불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책으로 반일(反日) 정책을 급히 꺼내들었다. 일단 대통령이 일본에 강경한 발언을 하면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덮어놓고 지지해주자는 여론이 나오므로 역대 정권에서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반일 발언을 회심의 카드로 사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급한 나머지 큰 무리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였으며, 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8월 14일에는 일본 [[천황]]을 향해 역사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였다. 두 행동 모두 역대 그 어떤 대한민국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돌발적인 행동으로, 한일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 소식은 외신을 통해 보도되며 [[독도]]가 세계적인 영토분쟁지역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분쟁 지역화 되는 것은 한국의 국익에 어긋난다. 즉,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이익(지지율 확보) 때문에 국익을 훼손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8월 14일, 한일관계를 기어코 끝장내버린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천황 사과 요구' 발언이 터지고 만다.
 
 
{{인용문|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다|이명박 전 대통령|2012년 8월 14일}}
 
 
이 발언은 일본인 입장에서 크게 3가지의 빡침 포인트가 있다. 첫째, 일본 천황은 한국에 방문할 그 어떤 계획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치 천황이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처럼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사과하라며 기만했다. 둘째, 천황은 일본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므로 함부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는데, 총리나 다른 정치인이 아닌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러한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언행이었다. 셋째, 법적으로 천황은 정치 권력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 즉, 천황은 한일 역사문제에 대하여 사과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천황에게 정치적 발언을 요구한 것은 천황의 권력을 인정해버리는 무식한 발언이다. 추가로, 당시 천황인 아키히토 천황은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인물로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종종 해왔는데, 이러한 노력들을 모두 무시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 발언은 한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로 10년 넘게 이어진 한국와 일본 사이의 화해 분위기는 하룻밤 꿈으로 허무하게 끝났고, 한류는 싸늘하게 식었다. 일본 정치계에서 우익 세력이 힘을 얻었으며,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혐한]]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99년부터 2012년 이전까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답하는 비율이 비호감 비율의 2배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2012년을 기점으로 비호감이라 응답하는 비율이 호감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 이후로 한국의 [[반일감정]]과 일본의 [[혐한감정]]은 서로가 서로의 양분으로 삼으며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2012년 이후로 한일관계는 [[2015년 위안부 합의]], 2018년 [[한일 무역 분쟁]]과 그로 인한 [[노 재팬 운동]] 등의 사건에 따라 격랑을 겪었으나 반일과 혐한의 악순환이라는 큰 기조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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