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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김영삼 전 대통령|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 방한 기자회견에서}}
 
{{인용문|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김영삼 전 대통령|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주석 방한 기자회견에서}}
  
이러한 당찬 발언과는 달리, 1997년 말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한-일의 전세는 역전되었다. 1998년, 경제위기에 빠진 한국을 향해 일본은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 선언하였다. 한일 어업협정은 1965년 한일수교 당시 체결된 것으로, 한국 측에 비교적 유리한 협정이어서 일본은 이 협정을 다시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따라서, 일본의 일반적 한일 어업협정 파기는 한국이 위기에 놓여 혼란한 틈을 타 뒷통수를 후리는 도적놈같은 행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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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당찬 발언과는 달리, 1997년 말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한-일의 전세는 역전되었다. 1998년, 경제위기에 빠진 한국을 향해 일본은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 선언하였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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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부 ===
김대중 정부는 반일감정을 청산하고 한일관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 게이조]] 일본 총리는 일명 [[김대중-오부치 선언]](정식 명칭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합의하며 양국의 우호협력 결의를 다졌다.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밝히며 역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2002년에는 [[2002 한일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의 공동 개최로 이뤄지면서 한일관계는 대한민국 역사상 좋은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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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는
 
 
{{인용문|좋은 일본 문화 받아들이자.|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민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한일간의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를 적극적으로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음성적으로만 수입되던 일본산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이 적극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 개방 정책은 시행 초기에 많은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일본의 문화가 한국에 쏟아져 내려오면 한국이 일본의 문화적 식민지가 될 것이라는 우려부터, 한민족 문화가 말살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까지 다양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정작 한일 문화개방은 한국보다 일본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겨울연가]]> 등 한국의 드라마와 음악이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며 [[한류]]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의 문화가 해외로 수출되어 성공한 첫 사례로서, 이후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일본 대중은 한국을 전쟁 국가, 독재 국가로만 인식해왔는데,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 반면, 일본 문화는 한국에서 마이너한 취미 정도로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한국 문화계는 그동안 일본의 게임이나 영화, 음악을 베껴오며 안일하게 처신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됨으로서 오히려 한국 고유의 문화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에 뒤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국민은 서로의 문화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 2012년 이후 ===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일관계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양호하게 유지되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기에 접어든 2012년을 계기로 크게 악화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일관계는 2012년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2012년은 한일관계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오사카]] 출생이기도 하고, 이명박 정부는 친일 정권이라는 비판이 있었을 만큼 정권 초기부터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임기 4년차인 2012년 들어 친인척 비리가 드러나고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며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이 가속화 되었는데, 불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책으로 반일(反日) 정책을 급히 꺼내들었다. 일단 대통령이 일본에 강경한 발언을 하면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덮어놓고 지지해주자는 여론이 나오므로 역대 정권에서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반일 발언을 회심의 카드로 사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급한 나머지 큰 무리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였으며, 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8월 14일에는 일본 [[천황]]을 향해 역사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였다. 두 행동 모두 역대 그 어떤 대한민국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돌발적인 행동으로, 한일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 소식은 외신을 통해 보도되며 [[독도]]가 세계적인 영토분쟁지역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라 분쟁 지역화 되는 것은 한국의 국익에 어긋난다. 즉,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이익(지지율 확보) 때문에 국익을 훼손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8월 14일, 한일관계를 기어코 끝장내버린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천황 사과 요구' 발언이 터지고 만다.
 
 
 
{{인용문|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다|이명박 전 대통령|2012년 8월 14일}}
 
 
 
이 발언은 일본인 입장에서 크게 3가지의 빡침 포인트가 있다. 첫째, 일본 천황은 한국에 방문할 그 어떤 계획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치 천황이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것처럼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사과하라며 기만했다. 둘째, 천황은 일본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므로 함부로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는데, 총리나 다른 정치인이 아닌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러한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무례한 언행이었다. 셋째, 법적으로 천황은 정치 권력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 어떤 정치적 발언도 할 수 없다. 즉, 천황은 한일 역사문제에 대하여 사과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천황에게 정치적 발언을 요구한 것은 천황의 권력을 인정해버리는 무식한 발언이다. 추가로, 당시 천황인 아키히토 천황은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인물로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종종 해왔는데, 이러한 노력들을 모두 무시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 발언은 한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로 10년 넘게 이어진 한국와 일본 사이의 화해 분위기는 하룻밤 꿈으로 허무하게 끝났고, 한류는 싸늘하게 식었다. 일본 정치계에서 우익 세력이 힘을 얻었으며,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혐한]]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99년부터 2012년 이전까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답하는 비율이 비호감 비율의 2배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나, 2012년을 기점으로 비호감이라 응답하는 비율이 호감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 이후로 한국의 [[반일감정]]과 일본의 [[혐한감정]]은 서로가 서로의 양분으로 삼으며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2012년 이후로 한일관계는 [[2015년 위안부 합의]], 2018년 [[한일 무역 분쟁]]과 그로 인한 [[노 재팬 운동]] 등의 사건에 따라 격랑을 겪었으나 반일과 혐한의 악순환이라는 큰 기조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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