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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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파일:윤보선.jpg|300픽셀|섬네일|[[윤보선]](1960년)]] |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ref>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ref> |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로 제4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치소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이었던 [[윤치호]]의 사촌 동생이므로 윤보선은 [[윤치호]]의 조카뻘이 되는 셈이다. 그는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하였다. 자(字)는 경천(敬天), 호는 해위(海韋)이다.<ref>해위라는 아호는 상하이에 있을 때 신규식이 지어준 별명이다. 윤보선의 본처 민씨가 낳은 딸은 신규식의 서자였던 신준호에게 시집갔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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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 | 5대, 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 전력을 문제삼았다가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지칭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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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 === 초기 활동 === | ||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 1919년에 여운형의 주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에 선출됐다. 그러나 아버지 윤치소나 당숙 [[윤치호]]는 [[이승만]] 등이 젊은이들을 꼬드겨서 탈선시킨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신익희]]가 영국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느냐는 권고하에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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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 | === 해방 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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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당 운동 === | === 야당 운동 === | ||
− |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ref>,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 + | 5대,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했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들인 김도연, 김준연 등도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아 사상을 의심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민주당 구파였으나 당과 거리를 두던 [[허정]]도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했다. [[한민당]]에 반감을 가졌던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해방 후와 6.25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에게 몰표를 주는 이변이 발생했다. 6대 대선에서는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허정과 경합했는데 그가 사퇴할 것처럼 보이다가 사퇴하지 않자 다혈질이던 허정과 심하게 싸웠고<ref>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ref>, 허정이 물러서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1972년 국민당을 창당했으나 정당해산령으로 폐쇄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암살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90년]] 사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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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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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 기타 == | ||
− | + | 1949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그는 서울시내에 양변기를 도입했다. 6.25 전쟁으로 확산되지 못했지만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양변기 보급을 확산시킨다. 그러나 양변기가 지방의 중소도시들까지 확산된 것은 1980년 이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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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집안의 주선으로 민영환의 6촌 동생인 민영철(閔泳喆)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본부인 민씨와의 사이는 삐그덕거렸고 별거하게 된다. 그러나 민씨 부인이 1937년 사망함으로써 결혼관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1948년 한신대학교와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단념한 여성 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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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 | {{대한민국의 대통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