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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오쯔양'''(조자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와 당 총서기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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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년생으로 국공내전 시기에 홍군 정치간부를 지냈다. 이후 1960년대 초에는 광둥성 당 서기를 지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했다가 1970년대 말 쓰촨성 당 서기에 발탁되었다. 그는 쓰촨성 당 서기 시절 실시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정책으로 덩샤오핑의 부름을 받고 국무원 총리<ref>당시 국무원 총리 겸 당 주석은 마오쩌둥이 직접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알려진 화궈펑이었다. 화궈펑은 당 주석과 국무원 총리직을 겸임했으나 이후 총리직을 자오쯔양에게 넘겨주고, 덩샤오핑이 당 중앙위원회 서기처를 부활시키고 당 총서기에 후야오방을 임명함으로써 그는 완전히 실권을 상실했고 11기 6중전회에서 당 주석직에서 사임했고, 이듬해인 1982년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의 자격마저 상실했다.</ref>가 되었다. 자오쯔양이 국무원 총리이던 시기에 당 총 서기는 후야오방이었다. 후야오방의 민주적, 개혁적 성향은 덩샤오핑을 포함한 원로방을 불편하게 했고 결국 덩샤오핑은 1986년말 학생 시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 1987년 1월에 후야오방을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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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야오방의 후임 총 서기에는 자오쯔양이 임명됐고, 자오쯔양이 떠난 총리에는 리펑이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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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에는 그의 일생을 바꾼, 그리고 중국의 현대사를 바꾼 대사건이 일어났다. 후야오방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제2차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강경 진압파이던 덩샤오핑과의 의견 충돌로 당 총서기직에서 해임됐는데 당시 그의 해임은 덩샤오핑 등 8인의 원로에 의해 결정됐다. 자오쯔양의 후임 당 총서기에는 장쩌민이 임명됐고, 실각한 그는 2005년 사망까지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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