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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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4월 15일,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였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7일,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면서 천안문 사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후야오방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 언론 자유, 반부패 등 더 폭넓은 정치 이슈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4월 15일,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였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7일,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면서 천안문 사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후야오방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 언론 자유, 반부패 등 더 폭넓은 정치 이슈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 ||
− | 한편,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시위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강경진압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시위대를 옹호하고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였다. 당 내부의 대립 속에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천안문 광장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강경진압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었다. 계엄령 선포를 앞둔 5월 19일, | + | 한편,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시위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강경진압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시위대를 옹호하고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였다. 당 내부의 대립 속에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천안문 광장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강경진압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었다. 계엄령 선포를 앞둔 5월 19일, 자오쯔양은 천안문 광장을 방문하여 시위대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
{{대사|미안합니다. 동지들,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시오!}} | {{대사|미안합니다. 동지들,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