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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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파일:천안문탱크맨.jpg|섬네일|250픽셀|천안문 광장에서 탱크를 막아서는 청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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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좌절된 중국의 민주화 운동}} | {{대사|좌절된 중국의 민주화 운동}} | ||
'''1989년 천안문 사건'''({{llang|zh|天安门事件}}) 또는 '''6·4 사건'''({{llang|zh|六四事件}})은 1989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검색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중국 국민의 정당한 민주화 요구를 [[탱크]]를 앞세워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천안문 대학살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 '''1989년 천안문 사건'''({{llang|zh|天安门事件}}) 또는 '''6·4 사건'''({{llang|zh|六四事件}})은 1989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검색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중국 국민의 정당한 민주화 요구를 [[탱크]]를 앞세워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천안문 대학살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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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과정 == | == 진행 과정 == | ||
− | [[파일:후야오방서거.jpg| | + | [[파일:후야오방서거.jpg|250픽셀|섬네일|후야오방 당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천안문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4월 15일,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였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7일,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면서 천안문 사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후야오방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 언론 자유, 반부패 등 더 폭넓은 정치 이슈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4월 15일,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였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7일,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면서 천안문 사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후야오방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 언론 자유, 반부패 등 더 폭넓은 정치 이슈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 ||
− | 한편,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시위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강경진압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시위대를 옹호하고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였다. 당 내부의 대립 속에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천안문 광장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강경진압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었다. 계엄령 선포를 앞둔 5월 19일, | + | 한편,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시위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강경진압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시위대를 옹호하고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였다. 당 내부의 대립 속에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천안문 광장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강경진압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었다. 계엄령 선포를 앞둔 5월 19일, 자오쯔양은 천안문 광장을 방문하여 시위대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
{{대사|미안합니다. 동지들,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시오!}} | {{대사|미안합니다. 동지들, 제가 너무 늦게 왔지요.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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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우려 속에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1990년대 들어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민주화 요구는 묻혀갔다. 그러나 감시와 검열을 통해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독재로 인한 모순은 계속 쌓여만 가고 있는 만큼 결국에는 제2의 천안문 사태가 다시 한번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 전 세계의 우려 속에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1990년대 들어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민주화 요구는 묻혀갔다. 그러나 감시와 검열을 통해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독재로 인한 모순은 계속 쌓여만 가고 있는 만큼 결국에는 제2의 천안문 사태가 다시 한번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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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89년]] | [[분류:1989년]] | ||
[[분류:20세기 중국]] | [[분류:20세기 중국]] | ||
[[분류:정치]] | [[분류: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