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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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ribbon.svg 누리위키는 1989년, 천안문 광장에서 있었던 일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합니다.

탱크를 막아선 한 청년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를 막아서는 청년

1989년 천안문 사건(중국어: 天安门事件) 또는 6·4 사건(중국어: 六四事件)은 1989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일련의 민주화 운동이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검색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중국 국민의 정당한 민주화 요구를 탱크를 앞세워 폭력적으로 진압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천안문 대학살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개요[편집]

천안문 사건이라고 하면 1919년에 있었던 제1차 천안문 사건, 1976년에 있었던 제2차 천안문 사건, 1989년에 있었던 제3차 천안문 사건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3차 천안문 사건이다. 그냥 천안문 사건이라고 말하면 보통은 제3차 천안문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1989년 천안문 사건은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주도한 민주화 운동이다. 특별히 주도하는 세력 없이, 각계각층의 중국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배경[편집]

덩샤오핑문화대혁명을 비판하고, 과감한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제도를 중국에 이식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와 실업자인플레이션 문제가 발생하여 중국 국민의 불만을 샀다.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공산당 간부들에 의한 부정부패 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갔으며 사회 모순이 심화하였다. 이에 따라서 중국 공산당에 부정부패 문제 척결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진행 과정[편집]

후야오방 당총서기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천안문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4월 15일,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였던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 17일,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진하면서 천안문 사태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후야오방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재평가를 요구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화, 언론 자유, 반부패 등 더 폭넓은 정치 이슈를 요구하는 시위로 발전하였다.

한편,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 시위대를 처리하는 방식을 두고 강경진압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였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赵紫阳)은 시위대를 옹호하고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였다. 당 내부의 대립 속에 시위대의 규모는 커져만 갔다. 천안문 광장에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결국 강경진압파가 우위를 점하면서 계엄령 선포가 결정되었다. 계엄령 선포를 앞둔 5월 19일, 평양에서 김일성과의 회담 중에 관련 소식을 전해듣고 급하게 돌아온 자오쯔양은 천안문 광장을 방문하여 시위대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5월 20일, 베이징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인민해방군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진압을 시도하지는 않고 군과 시위대는 한동안 평화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당국은 인민해방군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인민해방군은 “인민”해방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중국 인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서슴지 않았으며, 탱크와 장갑차가 군인을 뒤따라 투입되어 남은 시민들을 깔아뭉갰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중국 당국에서는 200~3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는 반면, 뉴욕타임즈에서는 400~8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 적십자사에서는 2,600명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서방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되었으며, 특히 천안문 광장에서 일렬로 서 있는 탱크 앞을 막아서는 한 남자의 모습이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

영향[편집]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던 덩샤오핑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1989년 9월 4일, 덩샤오핑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사임한다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전 세계의 우려 속에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1990년대 들어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민주화 요구는 묻혀갔다. 그러나 감시와 검열을 통해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은 한계가 있고, 독재로 인한 모순은 계속 쌓여만 가고 있는 만큼 결국에는 제2의 천안문 사태가 다시 한번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