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다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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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호국의다리유래.jpg| | + | [[파일:호국의다리유래.jpg|250픽셀|섬네일|[[칠곡호국평화전시관]]에 전시된 호국의 다리 모형]] |
구 왜관철교는 [[한국전쟁]]과 관련이 깊은 장소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였던 1950년 8월 3일,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1기병 사단장 로버트 게이(Robert R. Gay)의 명령에 따라 왜관철교를 포함한 낙동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였다. 이후 왜관철교 인근에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인민군]]과 [[UN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장기간 이어졌다. 특히 8월 16일에는 B29 전투기 98대가 출격하여 북한군이 상주하던 낙동강 건너편에 폭탄을 쏟아붓는 융단폭격을 하였다. 끝내, 이곳에서 UN군이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성공하면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 왜관철교에는 '''호국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오늘날 칠곡군은 '''호국평화의 도시'''를 자처하고 있다. | 구 왜관철교는 [[한국전쟁]]과 관련이 깊은 장소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였던 1950년 8월 3일,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1기병 사단장 로버트 게이(Robert R. Gay)의 명령에 따라 왜관철교를 포함한 낙동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였다. 이후 왜관철교 인근에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인민군]]과 [[UN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장기간 이어졌다. 특히 8월 16일에는 B29 전투기 98대가 출격하여 북한군이 상주하던 낙동강 건너편에 폭탄을 쏟아붓는 융단폭격을 하였다. 끝내, 이곳에서 UN군이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성공하면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구 왜관철교에는 '''호국의 다리'''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오늘날 칠곡군은 '''호국평화의 도시'''를 자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