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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6일 (수) 00:24 판

파일:김정일2011.jpg
김정일(2011년 8월)

김정일(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1994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김정일은 북한의 건국자이자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한 직후 권력을 승계하였다.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2009년 4월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김정일은 2010년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100인 중 31위에 선정된 바 있다.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향년 70세로 사망하였으며 19일에 사망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사망 이후,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그 뒤를 이었다. 사망 이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의 “영원한 총비서” 그리고 “영원한 위원장”로 추대되었다. 김정일의 생일은 북한에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김일성의 권력을 승계하는 데에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995년 1월 1일, 김정일은 한 인민군 부대를 시찰했는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 승계자로서의 첫 공식 활동이었다. 이는 당시 김일성 사후 북한의 향방에 관심이 쏠려있던 상황에서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10월 10일,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창당 50주년을 맞아 치러진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감상하였으며, 이는 김일성의 사후 벌어진 첫 주요 공식행사 참여로 기록되고 있다. 

김정일은 1997년 10월 8일,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총비서” 자리를 공식적으로 물려받았다. 1998년에는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시켜 실질적인 국가의 최고 직책으로 만들었으며,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김정일은 북한의 국가 원수로 인정되었다. 또한, 1998년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는 헌법개정을 통해 주석직을 폐지하고, 김일성을 북한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김정일은 이로서 주석직을 영구히 포기하였지만, 당과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김정일은 총리인 최영림,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인 김영남과 함께 3두 정치의 일부분이다. 형식상으로 국방위원장, 총리,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은 각각 동일한 권력을 가진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삼권분립과도 유사한 것이다. 김정일은 군사를 장악하고, 최영림(총리)은 정부를 대표하고,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은 외교에 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김정일이 모든 정부조직과 국가를 통치하고 있어 전형적인 독재의 형태를 보인다. 

경제정책

북한의 경제는 국가에서 완전히 통제하는 형식인데, 1990년대 국가경제정책이 잘못 세워지면서 1990년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에 극심한 홍수가 북한에 닥치면서 토지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극심한 기근으로 이어졌으며 국가경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처럼 국가가 전복될지도 모르는 위기가 닥치자,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표방하며 군사력을 강화, 정권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 결과, 범국가적 차원에서, 북한 당국에서는 북한이 1996년부터 플러스 경제성장률로 돌아섰다고 주장하였다. 

1990년의 대기근 사태 이후, 북한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소규모의 물물교환과 거래를 일부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북한 경제는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과거에 비해서 자유시장 체제를 다소간 도입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김정일은 중국덩샤오핑이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취했던 행동과 유사한 경제개혁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실제로 2006년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해 감탄을 표하기도 하였다. 

외교

김정일은 남북관계 증진과 경제개방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사진은 개성공단 내에 위치한 편의점.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증진시키고 남한의 회사가 북한에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햇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김정일은 당시 초보 단계에 불과한 북한의 소프트웨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남한의 기술을 들여오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정책의 결과, 2003년에 개성공단이 착공에 들어갔다. 개성공단은 당시 250여 개의 남한 회사가 참여하는 가운데, 10만 여 명의 북한 노동자를 채용시킬 계획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목표치에는 못 미치고 있다. 2012년 1월을 기점으로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북측 노동자수는 5만 명을 돌파했다. 

1994년, 북한과 미국은 핵동결 협약을 채결한 바 있다. 이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정지 및 해체시키는 대신, 전력 발전용 원자로 2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2002년, 미국 특사의 방문 중, 김정일 정부는 그동안 몰래 핵무기를 개발해오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며, 돌연 핵동결 협약을 파기 선언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과 미국(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 사이에는 새로운 갈등이 유발되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관영텔레비전을 통해 첫 지하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숭배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북한 주민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북한 학교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신격화하여 가르친다. 심지어 많은 북한 사람들은 김정일이 마법을 부려 날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010년에 북한 매체에서는 김정일의 옷차림이 세계적인 패션 유행이 되고 있다고 선전하기도 하였다.[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