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리 쇼크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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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쇼크'''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북미 [[비디오 게임]]계에 큰 영향을 (안좋은 쪽으로) 끼친 사건이다. 저질 게임의 양산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저명하게 알려준 사건이기도 하다. 1985년에 되어서야 북미 비디오게임계는 슬슬 부활하여 87년 [[닌텐도]]로 인하여 간신히 다시 살아난다. 유럽과 일본 등 북미가 아닌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아타리 쇼크'''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북미 [[비디오 게임]]계에 큰 영향을 (안좋은 쪽으로) 끼친 사건이다. 저질 게임의 양산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저명하게 알려준 사건이기도 하다. 1985년에 되어서야 북미 비디오게임계는 슬슬 부활하여 87년 [[닌텐도]]로 인하여 간신히 다시 살아난다. 유럽과 일본 등 북미가 아닌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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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리 2600]]의 성공 === | === [[아타리 2600]]의 성공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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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는 외부에서 소프트웨어를 바꿔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 가능한 [[아타리 2600]]을 1977년에 발매했다. 초기에는 판매 실적이 떨어졌지만 1980년 이후 [[스페이스 인베이더]], [[배틀존]], [[팩맨]] <ref>비록 쓰레기 게임이였지만</ref> 등의 인기 [[아케이드 게임]]이 이식되어 인기에 불이 붙었다. | [[아타리]]는 외부에서 소프트웨어를 바꿔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 가능한 [[아타리 2600]]을 1977년에 발매했다. 초기에는 판매 실적이 떨어졌지만 1980년 이후 [[스페이스 인베이더]], [[배틀존]], [[팩맨]] <ref>비록 쓰레기 게임이였지만</ref> 등의 인기 [[아케이드 게임]]이 이식되어 인기에 불이 붙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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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잡한 게임들의 양산 === | === 조잡한 게임들의 양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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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2년경부터는 가정용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려 게임을 만든적도 없는 회사들이 [[비디오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회사들이 고용한 개발자는 [[아타리]]나 [[액티비전]] 등과는 달리 [[게임]]을 제대로 해본적조차 없었고, 결과적으로 [[쓰레기 게임|매우 낮은 질을 가진 소프트웨어]]들이 시장에 범람했다. 극단적인 예시로는 애완동물의 사료를 만드는 네슬레 퓨리나나 펩시 콜라 등의 음식을 맏느는 퀘이커 오츠 등도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회사들은 품질이 낮은 [[게임]] 소프트웨어를 양산하여 가정용 게임 시장의 신뢰를 낮추는데 큰 공을 세웠다. | 그러나 1982년경부터는 가정용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려 게임을 만든적도 없는 회사들이 [[비디오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회사들이 고용한 개발자는 [[아타리]]나 [[액티비전]] 등과는 달리 [[게임]]을 제대로 해본적조차 없었고, 결과적으로 [[쓰레기 게임|매우 낮은 질을 가진 소프트웨어]]들이 시장에 범람했다. 극단적인 예시로는 애완동물의 사료를 만드는 네슬레 퓨리나나 펩시 콜라 등의 음식을 맏느는 퀘이커 오츠 등도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회사들은 품질이 낮은 [[게임]] 소프트웨어를 양산하여 가정용 게임 시장의 신뢰를 낮추는데 큰 공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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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의 포화와 공급의 과잉 === | === 시장의 포화와 공급의 과잉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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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장에서는 [[아타리 2600]] 이외에도 [[페어차일드 채널 F]], [[아타리 5200]], [[콜레코비전]], [[인텔리비전]], [[아카디아 2001]], [[백트렉스]] 등의 엄청나게 많은 수의 [[가정용 콘솔]]이 있었고, [[아타리 7800]] 등의 차세대 게임기도 발표되고 있었다. 각각의 [[콘솔]]들은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급 과잉 상태였고 소프트웨어의 라인업을 보완하기 위해 [[쓰레기 게임|저질 게임 소프트웨어]]가 양산됐다. | 당시 시장에서는 [[아타리 2600]] 이외에도 [[페어차일드 채널 F]], [[아타리 5200]], [[콜레코비전]], [[인텔리비전]], [[아카디아 2001]], [[백트렉스]] 등의 엄청나게 많은 수의 [[가정용 콘솔]]이 있었고, [[아타리 7800]] 등의 차세대 게임기도 발표되고 있었다. 각각의 [[콘솔]]들은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급 과잉 상태였고 소프트웨어의 라인업을 보완하기 위해 [[쓰레기 게임|저질 게임 소프트웨어]]가 양산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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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이후 === | === 사건 이후 === | ||
− | 1985년 [[패밀리 컴퓨터]]가 북미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을때, [[콘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소매자들이 반대한 것이 장벽이 되었다. 수입될 시에 [[콘솔]]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들어온 것도 그 이유이고, 패밀리 컴퓨터 로봇도 게임기가 아니라는 PR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 <ref>[[wikipedia:Icons (TV series)|아이콘]], 시즌 4 에피소드 5010</ref> | + | 1985년 [[패밀리 컴퓨터]]가 북미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을때, [[콘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소매자들이 반대한 것이 장벽이 되었다. 수입될 시에 [[콘솔]]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들어온 것도 그 이유이고, 패밀리 컴퓨터 로봇도 게임기가 아니라는 PR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wikipedia:Icons (TV series)|아이콘]] <ref>[[wikipedia:Icons (TV series)|아이콘]], 시즌 4 에피소드 5010</ref> |
마텔과 코레코의 [[콘솔]]은 자신들의 콘솔에 타사의 게임을 방지하는 보호를 하고 있었던 반면 [[아타리 2600]]은 그런 보호를 하지 않았고 타사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발 주자들에게 큰 교훈이 됐다. 아타리 쇼크의 재림 방지를 위해 [[패밀리 컴퓨터]] 이후의 하드는 하드웨어를 엄격히 보호하여 카트리지에 잠금칩이 탑재되어 있다. <ref>아타리 쇼크 이전에는 이런게 없었다.</ref> 저작권으로도 엄격히 관리되고 있어 NES는 Seal of Quality의 승인을 얻지 못한 소프트웨어의 판매는 불가능하게 됐다. 패미컴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의 범람을 막기 위해 취한 닌텐도의 강력한 타사 관리 방식은 [[EA]] 등과의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이후에 발매된 [[콘솔]]들은 모두 이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 마텔과 코레코의 [[콘솔]]은 자신들의 콘솔에 타사의 게임을 방지하는 보호를 하고 있었던 반면 [[아타리 2600]]은 그런 보호를 하지 않았고 타사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발 주자들에게 큰 교훈이 됐다. 아타리 쇼크의 재림 방지를 위해 [[패밀리 컴퓨터]] 이후의 하드는 하드웨어를 엄격히 보호하여 카트리지에 잠금칩이 탑재되어 있다. <ref>아타리 쇼크 이전에는 이런게 없었다.</ref> 저작권으로도 엄격히 관리되고 있어 NES는 Seal of Quality의 승인을 얻지 못한 소프트웨어의 판매는 불가능하게 됐다. 패미컴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의 범람을 막기 위해 취한 닌텐도의 강력한 타사 관리 방식은 [[EA]] 등과의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이후에 발매된 [[콘솔]]들은 모두 이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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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파 == | == 여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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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아타리 쇼크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개인용 취미 컴퓨터 마케팅이 성공하여 ZX 스펙트럼이나 VIC-1001 등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1983년 유럽의 게임 시장은 이미 게임기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옮겨갔다는 점도 아타리 쇼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원인으로 뽑힌다. [[아타리 2600]]의 몰락 이후 이 시기에는 잠시동안 유럽이 게임을 재패했던 적이 있다. 북미 게임계가 개인용 컴퓨터와 [[패밀리 컴퓨터]] 등으로 회생이 이뤄진 1980년대 후반에는 북미 게임시장의 성공을 발판으로 유럽으로도 진출하니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어도 간접적 영향은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유럽에서는 아타리 쇼크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개인용 취미 컴퓨터 마케팅이 성공하여 ZX 스펙트럼이나 VIC-1001 등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1983년 유럽의 게임 시장은 이미 게임기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옮겨갔다는 점도 아타리 쇼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원인으로 뽑힌다. [[아타리 2600]]의 몰락 이후 이 시기에는 잠시동안 유럽이 게임을 재패했던 적이 있다. 북미 게임계가 개인용 컴퓨터와 [[패밀리 컴퓨터]] 등으로 회생이 이뤄진 1980년대 후반에는 북미 게임시장의 성공을 발판으로 유럽으로도 진출하니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어도 간접적 영향은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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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시 아타리 쇼크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게임계는 [[아타리 2600]]을 비롯한 콘솔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타리 쇼크 이후 북미에 개인용 취미 PC 붐이 일어났을때 MSX가 등장하여 북미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였기에 역시 간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북미에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고 있던 당시에 일본에서는 [[패밀리 컴퓨터]]가 히트를 치고 있었으나, [[이마나시 히로시]]도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고 말했다. <ref>[http://www.nintendo.co.jp/n10/interview/mario25th/vol2/index3.html]</ref> 아타리 쇼크는 1986년 등장한 [[닌텐도]]의 까다로운 라이선스 제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타리 쇼크를 경험하지 않은 일본에서 헤비 PC는 대중적이지 않았지만 PC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를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이 태어나 소프트웨어가 게임기에 이식되면서 콘솔의 가치가 증가하게 됐다. | 일본 역시 아타리 쇼크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게임계는 [[아타리 2600]]을 비롯한 콘솔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타리 쇼크 이후 북미에 개인용 취미 PC 붐이 일어났을때 MSX가 등장하여 북미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였기에 역시 간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북미에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고 있던 당시에 일본에서는 [[패밀리 컴퓨터]]가 히트를 치고 있었으나, [[이마나시 히로시]]도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고 말했다. <ref>[http://www.nintendo.co.jp/n10/interview/mario25th/vol2/index3.html]</ref> 아타리 쇼크는 1986년 등장한 [[닌텐도]]의 까다로운 라이선스 제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타리 쇼크를 경험하지 않은 일본에서 헤비 PC는 대중적이지 않았지만 PC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를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이 태어나 소프트웨어가 게임기에 이식되면서 콘솔의 가치가 증가하게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