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리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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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의 가정용 게임 시장의 발흥시키고 붕괴시킨 아타리 2600.

아타리 쇼크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북미 비디오 게임계에 큰 영향을 (안좋은 쪽으로) 끼친 사건이다. 저질 게임의 양산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저명하게 알려준 사건이기도 하다. 1985년에 되어서야 북미 비디오게임계는 슬슬 부활하여 87년 닌텐도로 인하여 간신히 다시 살아난다. 유럽과 일본 등 북미가 아닌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개요[편집]

1982년 북미의 가정용 콘솔 매출은 32억달러에 도달했으나 85년에는 1억달러로 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북미의 가정용 콘솔 시장은 이 사건 이후로 붕괴하고 비디오 게임은 주로 휴대용 콘솔이나 가정용 컴퓨터 시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선도적인 게임 제조업체 대부분이 파산 위기에 몰렸고, 당시 게임 시장의 최고를 차지했던 아타리 역시 붕괴되었다. 83년부터 85년까지 있었던 초유의 이 사태를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사태혹은 아타리 쇼크라고 불린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자의 이름을 많이 쓰는데, 아타리 쇼크라는 명칭 자체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타리 VCS와 함께 붕괴된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은 1985년 닌텐도가 발매한 패밀리 컴퓨터가 대박을 치면서 슬금슬금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1986년 당시 닌텐도의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는 "쓰레기 게임의 남발이 아타리의 시장 붕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많은 게임 개발자들과 게이머들의 공감을 얻었고, 이와타 사토루 역시 "불량한 소프트웨어의 남발로 인하여 고객들이 실망했다"는 말을 남겼다. [1] 여기에서 파생되어 하드웨어와 장르에 관계 없이 저질 소프트웨어나 게임이 난무하여 고객들의 신뢰를 잃고 시장의 수요와 규모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일을 아타리 쇼크의 재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6년 일본의 NHK는 관련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프로그램에서는 82년의 크리스마스 경쟁에서 시장이 갑자기 붕괴한 것이 아닌 82년부터 85년까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아타리 쇼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닌텐도가 자사의 라이선스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이라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사건[편집]

1977년 미국 아타리사에서 개발된 가정용 콘솔 아타리 2600은 하드웨어 본체에 내장된 게임 소프트웨어의 프로그램 롬을 카트리지에 담아 외부에 공급할 수 있게 했도록 했고, 이는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아타리 2600의 인기는 5년도 안되어 사그라들고 만다. 아래는 아타리 2600 및 관련 제품 시장의 상황을 단계적으로 서술한다.

아타리 2600의 성공[편집]

아타리는 외부에서 소프트웨어를 바꿔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 가능한 아타리 2600을 1977년에 발매했다. 초기에는 판매 실적이 떨어졌지만 1980년 이후 스페이스 인베이더, 배틀존, 팩맨 [2] 등의 인기 아케이드 게임이 이식되어 인기에 불이 붙었다.

초기 아타리의 경영진이였던 엘렌 밀러가 워너와의 불화로 뛰쳐나와 1979년 설립한 액티비전이 사상 최초로 타사의 콘솔용 소프트웨를 발표하였다. 아타리라고 쓰고 워너라고 읽는다액티비전을 인정하지 않고 액티비전의 판매 금지 소송을 걸었으나 로열티를 지불하는 것으로 1982년 합의를 봤다. 이 사건으로 타사의 것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것을 계기로 비디오 게임 개발자들이 이쪽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유명한 아타리아타리 2600으로 하면 홍보가 더욱 쉬웠기도 할 것이다.

아타리에 로열티만 지불하면 기본적으로 어느 누구라도 아타리사와의 관계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아타리 2600으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판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으로 시장에는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가 유통된다. [3]

물론 이런 소프트웨어를 재생하는 아타리 2600 자체의 매출도 날개돋힌듯 팔려나간다.

당시 아타리 200을 비롯해 각 하드웨어의 프로그램 사양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각 회사들은 개발자를 뽑아내거나 리버스 엔지니어링[4] 등을 하고 게임을 개발했다. 사실 아타리 자신들 조차도 마텔이나 인텔레비전 개발자를 뽑아 고용했을 정도였다. [5]

조잡한 게임들의 양산[편집]

그래놀라로 유명한 퀘이크 오츠역시 게임산업에 뛰어들었었다.

그러나 1982년경부터는 가정용 게임 시장의 급격한 확대에 이끌려 게임을 만든적도 없는 회사들이 비디오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회사들이 고용한 개발자는 아타리액티비전 등과는 달리 게임을 제대로 해본적조차 없었고, 결과적으로 매우 낮은 질을 가진 소프트웨어들이 시장에 범람했다. 극단적인 예시로는 애완동물의 사료를 만드는 네슬레 퓨리나나 펩시 콜라 등의 음식을 맏느는 퀘이커 오츠 등도 게임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회사들은 품질이 낮은 게임 소프트웨어를 양산하여 가정용 게임 시장의 신뢰를 낮추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아타리의 병크또한 무시할 수 없었는데, 게임에 대한 질을 최소한의 검토도 하지 않고 통과시킨 것이다. [6] 사용자 측이 낸 게임 리뷰 자체도 당시에는 발달이 되지 않았었고 [7] 결국 플레이어들은 매장에 있는 표지 정도로 내용의 질을 추측하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8]

아타리 2600에 CD를 꽂을때까지는 게임의 질 자체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 게이머들의 구매 의욕을 낮췄다.

이 동안 게임을 제조하거나 판매하고 있었던 중소규모의 게임 개발사들은 개발 기업이 파산되고, 재고가 헐값 처분되고, 그런 헐값 소프트웨어가 시장의 정가 CD들의 가격 균형을 깨트리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파산한 게임사들의 소프트웨어가 지나치게 싸기에 신규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보였고, 사용자가 구매하는 양이 줄어드는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거기에 아타리가 발매한 빅 타이틀도 연이은 실패작이 나온다. 예를 들어 아케이드 게임 중 당시 인기있었던 팩맨 역시 질이 안좋았고, 영화 E.T.를 기반으로 만든 게임 E.T. 역시 AVGN조차 언급하기 싫어하는 쓰레기 게임이 됐다. 이 두개의 게임들은 1982년에 발매되어 나름대로의 매출이 있었지만 두 게임 다 지나치게 쓰레기 게임이여서 "이런게 잘팔리다니"라는 인식이 박혀 아타리의 이미지도 하락하고, 그나마도 지나치게 과잉생산하여 엄청난 양의 재고가 남아 아타리 측에서도 엄청난 손실이였다.

나중에 아타리 쇼크의 전범이라고도 볼 수 있는 E.T.쓰레기 게임의 상징이 됐는데, 아타리 쇼크 이후 1983년 9월 14대의 트럭이 뉴멕시코 지역에 이를 매립하였다고 뉴욕 타임즈가 보도했다. [9] 이는 도시전설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E.T.를 찾아내려고 삽질을 한다.

시장의 포화와 공급의 과잉[편집]

아타리 2600과 동시대에 공존했던 수많은 게임기 중 하나인 인텔리비전

당시 시장에서는 아타리 2600 이외에도 페어차일드 채널 F, 아타리 5200, 콜레코비전, 인텔리비전, 아카디아 2001, 백트렉스 등의 엄청나게 많은 수의 가정용 콘솔이 있었고, 아타리 7800 등의 차세대 게임기도 발표되고 있었다. 각각의 콘솔들은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급 과잉 상태였고 소프트웨어의 라인업을 보완하기 위해 저질 게임 소프트웨어가 양산됐다.

아타리 2600은 당시 발매로부터 6년가까이 지나 북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더 이상 점유율을 늘리는건 불가능했고, 시장은 이미 시장은 포화됐다.

저가 PC와의 경쟁[편집]

197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PC는 약 1000달러에 판매되고 있었다. [10]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컬러 그래픽 기능을 가지고 사운드 기능까지 추가된 TV에 연결하는 타입의 PC가 등장했다. 이러한 PC를 가정용 컴퓨터라고 불렀는데, 최초로 등장한 것은 아타리 400과 800이였지만 다른 회사에서 경쟁 기종이 등장하고 성능과 가격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가정용 컴퓨터는 아타리 2600보다 많은 메모리의 탑재, 그래픽과 사운드 기능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보여줘 더욱 고급 게임의 실현이 가능해졌다. 또한 게임 이외에도 워드 프로세서 등의 다양한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컴퓨터들은 ROM 카트리지에 소프트웨어를 유통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플로피 디스크나 CD 등으로도 게임이 유통 가능했고, 이 방법이 사실 유통에도 더 편리했다.

가정용 컴퓨터를 판매한 회사 중 하나인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은 게이머들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취하여 코모도어 64 구매시 다른 컴퓨터 및 게임기와의 거래도 가능했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PR을 했다. 이런 PR은 아타리마텔의 콘솔이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11]

또한 코모도 사는 다른 가정용 컴퓨터 회사와는 달리 가정용 컴퓨터 할인 상점은 물론 백화점과 완구점 같은 일반적인 가정용 콘솔의 판매 경로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모스 테크놀로지의 MOS 6502 CPU를 비롯한 반도체들을 코모도의 컴퓨터에 사용하여 PC의 저가화를 노렸고 가정용 콘솔들은 메모리도 높고, 그래픽에 사운드 기능도 훌륭하며, 가격까지 저렴한 PC에 밀리게 된다.

시장 붕괴[편집]

아타리 쇼크는 아타리를 인수한 워너에도 타격을 줬다.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자연히 비디오 게임 판매 경쟁이 일었다. 전례가 없는 엄청난 수의 콘솔과 게임 소프트웨어들이 발매됐고, 유통과 판매 측도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군부투했다. 게임들의 공급은 과잉 상태였고 소매점은 매장에 게임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반품을 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레드 오션을 염려했던 것인지 아타리 측에서는 1982년 4분기 실적 전망을 하향 조정하여 워너의 주가 폭락을 유발했다.

이 1982년 크리스마스가 아타리 쇼크의 발단이 된다. 다만, 1982년 당시 시장의 규모는 약 30억 달러인 등 여전히 규모는 컸고, 이 시점에서는 아직 시장붕괴를 논할 수준이 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새해가 된 1983년에는 수많은 게임 소프트웨어 악성 재고가 발생했다. 파산한 중소규모의 게임사들의 재고들은 반품도 불가능했고, 소매점은 재고 처분의 개념으로 매우 싸게 팔아치웠다. 이런 분위기에 재고 처분용이 아닌 일반적인 정품 소프트웨어들도 가격이 줄줄이 하락하여 아타리도 가격 인하에 들어갔고, 게임의 가치는 매우 낮아지게 된다. 30달러였던 게임이 5달러에 판매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2달러 미만까지로 내려가는 게임까지 등장하게 됐다.

1983년이 되어서도 시장은 활발했고 발매된 게임들도 많았지만 정규 가격의 소프트웨어 시장은 대폭 축소됐고 이용자들은 재고 처리된 게임들을 주로 구매했다. 처음에는 게임이 저가화됐기에 이용자들이 좋아했지만 이런 게임들의 대부분은 저질 게임이였기에 금방 싫증을 냈다. 사용자들은 고가이지만 훌륭한 질을 가진 소프트웨어를 몰색하는 것을 멈추고 그냥 게임을 관뒀다.

판매 가격도 떨어지고 소비 마저 떨어지자 대부분의 게임 회사는 위기에 빠진다. 특히 아타리가 직격탄을 맞아 83년 2분기에는 극단적으로 상황이 안좋아졌다. 아타리의 적자는 멈추지 않았고 1984년 분할 및 매각됐다.

이 사건의 영향은 아타리 외 다른 회사에도 있었다. 코레코나 마그나 복스는 시장 붕괴에 잡힐까 우려하여 게임 사업에서 철수했다. 또 많은 대형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파산했으며, 아타리 2600에 참여한 회사들은 액티비전을 제외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파산했다. 아타리 2600에 뛰어들게 만든게 액티비전인데 지만 살아남음

대부분의 북미 소매점들도 이 사건 이후로 콘솔의 시대가 끝났다고 판단, 판매를 중단했다. 북미의 가정용 게임판은 패밀리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소멸되고 만다. [12]

이것이 오늘날 알려진 Video game crash of 1983, 1983년 비디오 게임 사태이다. 아타리 쇼크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달러화 정책으로 인하여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닉슨 쇼크에서 빗댄 것이다.

사건 이후[편집]

1985년 패밀리 컴퓨터가 북미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을때, 콘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소매자들이 반대한 것이 장벽이 되었다. 수입될 시에 콘솔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들어온 것도 그 이유이고, 패밀리 컴퓨터 로봇도 게임기가 아니라는 PR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 [13]

마텔과 코레코의 콘솔은 자신들의 콘솔에 타사의 게임을 방지하는 보호를 하고 있었던 반면 아타리 2600은 그런 보호를 하지 않았고 타사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발 주자들에게 큰 교훈이 됐다. 아타리 쇼크의 재림 방지를 위해 패밀리 컴퓨터 이후의 하드는 하드웨어를 엄격히 보호하여 카트리지에 잠금칩이 탑재되어 있다. [14] 저작권으로도 엄격히 관리되고 있어 NES는 Seal of Quality의 승인을 얻지 못한 소프트웨어의 판매는 불가능하게 됐다. 패미컴의 품질이 낮은 소프트웨어의 범람을 막기 위해 취한 닌텐도의 강력한 타사 관리 방식은 EA 등과의 불화를 낳기도 했지만 이후에 발매된 콘솔들은 모두 이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북미 가정용 게임 시장은 1988년에 23억달러, 89년에 50억달러까지 도달하여 아타리 쇼크에서의 부흥을 성공했다.

아타리는 이후 아타리 2600만큼 대박을 치는 콘솔도 없었고, 아타리 재규어 이후 쓸쓸하게 콘솔 시장에서 막을 내린다. 아타리 쇼크 이후 대부분의 콘솔들은 일본의 콘솔이 휩쓸었다. 북미제 콘솔이 다시끔 히트하는 것은 2001년 11월 등장한 XBOX에서였다.

여파[편집]

아타리 쇼크와 동시대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ZX 스펙트럼

유럽에서는 아타리 쇼크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개인용 취미 컴퓨터 마케팅이 성공하여 ZX 스펙트럼이나 VIC-1001 등이 성공을 거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1983년 유럽의 게임 시장은 이미 게임기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옮겨갔다는 점도 아타리 쇼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원인으로 뽑힌다. 아타리 2600의 몰락 이후 이 시기에는 잠시동안 유럽이 게임을 재패했던 적이 있다. 북미 게임계가 개인용 컴퓨터와 패밀리 컴퓨터 등으로 회생이 이뤄진 1980년대 후반에는 북미 게임시장의 성공을 발판으로 유럽으로도 진출하니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어도 간접적 영향은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타리 쇼크와 동시대에 일본에서 유행했던 패밀리 컴퓨터

일본 역시 아타리 쇼크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게임계는 아타리 2600을 비롯한 콘솔들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타리 쇼크 이후 북미에 개인용 취미 PC 붐이 일어났을때 MSX가 등장하여 북미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였기에 역시 간접적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북미에서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고 있던 당시에 일본에서는 패밀리 컴퓨터가 히트를 치고 있었으나, 이마나시 히로시도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고 말했다. [15] 아타리 쇼크는 1986년 등장한 닌텐도의 까다로운 라이선스 제도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타리 쇼크를 경험하지 않은 일본에서 헤비 PC는 대중적이지 않았지만 PC 게임은 롤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장르를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이 태어나 소프트웨어가 게임기에 이식되면서 콘솔의 가치가 증가하게 됐다.

반론[편집]

아타리 쇼크는 게임 시장의 질 저하에 의한 급격한 붕괴라는 설이 통설이지만, 이에 대해 반론도 있다. 우선 1983년 비디오 게임 사태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아타리 2600은 1979년 400만대, 80년 280만대, 81년 330만대, 82년 900만대, 83년 630만대, 84년 280만대 등 1983년에서 85년 매우 잘팔리고 있었으며, 82년에 갑작스레 붕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1982년 매출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가정용 콘솔 시장이 붕괴됐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80년대는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이 들어섰다고 보기는 힘들었고, 게임은 완구 시장의 하위 장르였을 뿐이다. 따라서 아타리 2600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완구의 유행에 불과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의 1982년 주가 폭락 역시 복합한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아타리 쇼크가 미국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아타리 쇼크를 경제학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재반론[편집]

쓰레기 게임이 당시에 남발하여 비디오 게임 시장이 규모가 크든 작든 일시적으로 침몰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아타리 쇼크의 원인은 소프트웨어의 판매 부진이지 하드웨어의 판매 부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콘솔이 잘 팔렸다고 해서 아타리 쇼크가 없었던 것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또 1982년에 폭발적으로 인기가 증가한 것은 1980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대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아타리 쇼크때 많은 게임사가 파산하여 추후 게임 개발 기술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다.

주의점[편집]

아타리 쇼크를 분석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아타리사 자신들의 실패였는지, 위너 커뮤니케이션이 저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한 경영 전략의 실패였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주의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아타리 쇼크라고 하여 아타리의 실패로 인하여 아타리가 몰락하고 그에 휘말려 게임 관련 업계가 폭삭 망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미국 내에서 해당 현상은 하드웨어 시장에 관여하고 있던 대부분의 게임회사에 나타나 모두가 곤경에 빠져있었기에 게임 업계 전체의 종합적인 현상으로 다뤄지고 있다.

추가 분석[편집]

2007년 일본의 닛케이 비즈니스는 아타리 쇼크의 상황이 2006년 일본의 게임 상황과 비슷하다는 설을 발표했다. [16] 당시 미국에서 게임 앤드 워치 등이 히트를 치고 있었지만 당시의 미국 게임 시장에서 '게임기'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출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제 2의 아타리 쇼크처럼 보이는 것 뿐이라는 지적이 있다.

같이보기[편집]

주석[편집]

  1. ^ [1]
  2. ^ 비록 쓰레기 게임이였지만
  3. ^ 공교롭게도 카카오 게임 플랫폼을 이용하는 것이 쉽게 홍보가 되자 모바일 게임 개발자들이 카카오 쪽으로 뛰어들은 현상과 비슷해보인다.
  4. ^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역추적하여 문서나 설계 기법 등을 알아내는 방법
  5. ^ 이것때문에 마텔에서는 산업스파이 혐의로 아타리를 고소한 적이 있다.
  6. ^ 표절 게임이나 저질 게임이 범람하여 카카오 게임 측이 검수도 안하냐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것과의 데자뷰가 느껴진다.
  7. ^ 게임 잡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82년부터 83년까지 여러 잡지가 창간되었었다. 증거 또한 빌보드 잡지에서도 가정용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 차트가 기록되어 있어 소프트웨어의 구매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뿐이다.
  8. ^ "콘텐츠 문화사 학회"의 「콘텐츠 문화사 연구 제 4호 24~42쪽, 2010년」
  9. ^ [2]
  10. ^ 2007년 기준으로 2천 5백달러 정도이다. 한화로 약 260만원 정도.
  11. ^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전략은 1983년이 되어서야 사용하였다.
  12. ^ 단, PC 게임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13. ^ 아이콘, 시즌 4 에피소드 5010
  14. ^ 아타리 쇼크 이전에는 이런게 없었다.
  15. ^ [3]
  16.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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