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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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15개의 죄목 중 대부분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지낼 때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죄목인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해당 사건의 배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네 번째의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메이 천황을 독살하고 [[메이지 천황]]을 천황 자리에 앉혔다는 음모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기 나라의 천황까지도 죽인 악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실제 고메이 천황이 독살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위의 15개의 죄목 중 대부분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지낼 때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죄목인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해당 사건의 배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네 번째의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메이 천황을 독살하고 [[메이지 천황]]을 천황 자리에 앉혔다는 음모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기 나라의 천황까지도 죽인 악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실제 고메이 천황이 독살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 투옥 및 사형 ===
 
[[파일:위국헌신군인본분.jpg|섬네일|150픽셀|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안중근이 투옥된 [[뤼순 감옥]]의 일본인 간수들은 안중근의 성품과 대의명분에 감탄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안중근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중근 같은 사람이 죄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 괴로워했는데, 안중근은 그에게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거꾸로 위로해 주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일 당일에 지바 도시치에게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귀를 적어서 선물해 주었는데, 지바 도시치는 이것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이 글귀는 현재 후손이 한국에 반환하여 [[안중근 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 소식을 전해듣고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에 안중근은 감옥에서 집필하고 있던 책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만나서 자신의 사형일을 미뤄 달라고 요청하였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역시 안중근의 인품에 그를 존경하고 있던 터라, 그의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도쿄에서 안중근을 즉시 사형할 것을 명하면서 히라이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끝마치지 못한채, 1910년 3월 26일에 [[뤼순 감옥]]에서 사형되었다.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유해가 묻힌 장소는 찾지 못하고 있다.
 
 
== 견해 ==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으면서 오히려 한국의 식민지화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세력이 충돌하고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에는 신중한 온건파였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급작스럽게 식민지로 만들 경우, 한국인들이 크게 반발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시간을 두고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이미지를 좋게 만든 뒤에 식민지로 삼아야 안정적인 식민지 운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면서, 강경파가 세력을 잡아 빠른 한국 강제 병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뒤 겨우 10달 만에 한국은 [[일제강점기|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들여서, 공식적인 외교 절차를 밟으며,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면서 한국을 더 확실하게 식민지로 만들려는 속셈에 가까웠다. 따라서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았다면, 식민지가 되는 시간은 조금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일본제국에 대한 반발심, 즉 독립 의지 자체가 꺾여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한국은 독립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미국의 일본학 학자 [[도널드 킨]](Donald Keene)은 그의 저서 <메이지라는 시대>에서 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메이지 천황]]을 존경했다고 서술하였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에는 이토가 메이지 천황을 ‘속이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내용이 있다. 즉, 안중근은 메이지 천황을 위해 ‘간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지, [[일본 제국]]이나 천황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인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므로, 일본인 간수와 재판관이 안중근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 주석 ==
 
== 주석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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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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