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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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 의사
출생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사망 1910년 3월 26일 (30세)
일본 제국 관동주 펑텐성 뤼순 감옥
사인 사형 (교수형)
본관 순흥 안씨 (順興 安氏)
별칭 안응칠 (아명)
칭호 의사 (義士)
종교 천주교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아시아의 단결을 주장했던 범아시아주의자였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 제국의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을사조약 체결 이후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공작을 암살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살 직후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910년 3월 26일에 사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매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양의 선진 문물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특히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집 안을 드나드는 사냥꾼들과 어울려서 화승총을 매고 다니며 사냥을 하는 것을 즐겼는데,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안중근은 명사수로 이름나 있었다. 1985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군사를 조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안태훈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대장인 김구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며 지켜주기도 하였다. 이때 김구는 안태훈의 첫째 아들인 안중근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당시 김구의 나이는 19살, 안중근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독립운동가의 역사적인 만남이었으나, 깊은 교류는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였던 니콜라 빌렘(한국 이름 홍석구)에게 세례를 받고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은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교육을 위해 대학교를 건립해야 한다는 안중근의 주장에 대해,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종교를 믿는 일에는 방해가 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안중근과 마찰을 빚었다. 프랑스인 신부들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에 매몰되어 있으며, 한국인들을 열등한 인종 취급하며 선교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중근은 크게 실망하고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이는 안중근이 서양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아시아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남아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교육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1906년, 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진남포로 거처를 옮긴 안중근은 이곳에 삼흥학교를 세웠다. 또한, 진남포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삼흥학교 및 돈의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1907년, 안중근은 일본제국의 감시를 피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편집]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러시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역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승강장에서 FN M1900 자동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격을 가했으며, 세 발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급소에 명중하였다. 안중근은 남은 총알로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궁내 대신 비서관,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太郞) 만주 철도 이사를 저격하여 큰 부상을 입혔다. 총격 직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1]

이후 안중근은 러시아 경비대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틀 뒤에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졌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위해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하였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일반적인 살인 혐의자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였다.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나열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첫 번째, 명성황후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위의 15개의 죄목 중 대부분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지낼 때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죄목인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해당 사건의 배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네 번째의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메이 천황을 독살하고 메이지 천황을 천황 자리에 앉혔다는 음모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기 나라의 천황까지도 죽인 악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실제 고메이 천황이 독살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투옥 및 사형[편집]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안중근이 투옥된 뤼순 감옥의 일본인 간수들은 안중근의 성품과 대의명분에 감탄하여 그를 존경하였다. 안중근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중근 같은 사람이 죄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 괴로워했는데, 안중근은 그에게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거꾸로 위로해 주었다. 안중근은 사형 집행일 당일에 지바 도시치에게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귀를 적어서 선물해 주었는데, 지바 도시치는 이것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이 글귀는 현재 후손이 한국에 반환하여 안중근 기념관에 보관되고 있다.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 소식을 전해듣고 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에 안중근은 감옥에서 집필하고 있던 책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만나서 자신의 사형일을 미뤄 달라고 요청하였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역시 안중근의 인품에 그를 존경하고 있던 터라, 그의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도쿄에서 안중근을 즉시 사형할 것을 명하면서 히라이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끝마치지 못한채, 1910년 3월 26일에 뤼순 감옥에서 사형되었다.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 감옥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유해가 묻힌 장소는 찾지 못하고 있다.

견해[편집]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으면서 오히려 한국의 식민지화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 세력이 충돌하고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에는 신중한 온건파였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급작스럽게 식민지로 만들 경우, 한국인들이 크게 반발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시간을 두고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이미지를 좋게 만든 뒤에 식민지로 삼아야 안정적인 식민지 운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면서, 강경파가 세력을 잡아 빠른 한국 강제 병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뒤 겨우 10달 만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들여서, 공식적인 외교 절차를 밟으며,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면서 한국을 더 확실하게 식민지로 만들려는 속셈에 가까웠다. 따라서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았다면, 식민지가 되는 시간은 조금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일본제국에 대한 반발심, 즉 독립 의지 자체가 꺾여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한국은 독립하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미국의 일본학 학자 도널드 킨(Donald Keene)은 그의 저서 <메이지라는 시대>에서 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메이지 천황을 존경했다고 서술하였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에는 이토가 메이지 천황을 ‘속이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내용이 있다. 즉, 안중근은 메이지 천황을 위해 ‘간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지, 일본 제국이나 천황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시각은 일본인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므로, 일본인 간수와 재판관이 안중근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주석[편집]

  1. ^ 일각에서는 안중근이 러시아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 한국 만세라고 외친 것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안중근이 에스페란토를 배웠다는 증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