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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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시티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9일 (목) 04:47 판 (이토 히로부미 저격)
안중근

안중근 의사
출생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사망 1910년 3월 26일 (30세)
일본 제국 관동주 펑텐성 뤼순 감옥
사인 사형 (교수형)
본관 순흥 안씨 (順興 安氏)
별칭 안응칠 (아명)
칭호 의사 (義士)
종교 천주교
상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아시아의 단결을 주장했던 범아시아주의자였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 제국의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을사조약 체결 이후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공작을 암살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살 직후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910년 3월 26일에 사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생애

초기 생애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매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서양의 선진 문물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특히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집 안을 드나드는 사냥꾼들과 어울려서 화승총을 매고 다니며 사냥을 하는 것을 즐겼는데, 사냥꾼들 사이에서도 안중근은 명사수로 이름나 있었다. 1985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군사를 조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안태훈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대장인 김구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며 지켜주기도 하였다. 이때 김구는 안태훈의 첫째 아들인 안중근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당시 김구의 나이는 19살, 안중근의 나이는 16살이었다.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독립운동가의 역사적인 만남이었으나, 깊은 교류는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였던 니콜라 빌렘(한국 이름 홍석구)에게 세례를 받고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은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교육을 위해 대학교를 건립해야 한다는 안중근의 주장에 대해, 프랑스인 신부들은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종교를 믿는 일에는 방해가 될 것이라며 반대하면서 안중근과 마찰을 빚었다. 프랑스인 신부들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에 매몰되어 있으며, 한국인들을 열등한 인종 취급하며 선교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중근은 크게 실망하고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이는 안중근이 서양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아시아주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남아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현실에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교육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1906년, 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진남포로 거처를 옮긴 안중근은 이곳에 삼흥학교를 세웠다. 또한, 진남포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삼흥학교 및 돈의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1907년, 안중근은 일본제국의 감시를 피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러시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역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역 승강장에서 FN M1900 자동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격을 가했으며, 세 발 모두 이토 히로부미의 급소에 명중하였다. 안중근은 남은 총알로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 모리 야스지로(森泰二郞) 궁내 대신 비서관,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太郞) 만주 철도 이사를 저격하여 큰 부상을 입혔다. 총격 직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1]

이후 안중근은 러시아 경비대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틀 뒤에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졌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위해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하였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일반적인 살인 혐의자가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였다.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나열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첫 번째, 명성황후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위의 15개의 죄목 중 대부분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지낼 때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죄목인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통감으로 오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해당 사건의 배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네 번째의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메이 천황을 독살하고 메이지 천황을 천황 자리에 앉혔다는 음모론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자기 나라의 천황까지도 죽인 악독한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인데, 실제 고메이 천황이 독살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주석

  1. ^ 일각에서는 안중근이 러시아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 한국 만세라고 외친 것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안중근이 에스페란토를 배웠다는 증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