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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미국]] [[LA]]에서 발매된 '찬가집'에서도 애국가의 작사가가 윤치호라고 적혀있다.
 
*1931년 [[미국]] [[LA]]에서 발매된 '찬가집'에서도 애국가의 작사가가 윤치호라고 적혀있다.
 
*필적 감정 결과 4군데 중 3군데는 [[윤치호]]의 일기장과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동일인으로 드러났다.
 
*필적 감정 결과 4군데 중 3군데는 [[윤치호]]의 일기장과 애국가 가사지의 필체가 동일인으로 드러났다.
한편 이에 대해서 반론도 존재하는데,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가 ''역술자''라는 표현으로 나와있다. 이것에 대해 노동은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명예교수는 윤치호가 단순히 애국가를 번역한 것이며,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저작'이라는 표현을 썼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준혁 한산대 역사학과 교수와 안민석 [[더불어민주당|새정치연합]] 의원은 부자였음에도 상세한 가계부를 쓰는 등 자신에 대한 세밀한 기록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일기장에 애국가와 관련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윤치호설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3.1운동]] 당시 애국가가 널리 불려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윤치호가 일기를 썼으나 역시 애국가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윤치호설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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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에 대해서 반론도 존재하는데,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가 ''역술자''라는 표현으로 나와있다. 이것에 대해 노동은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명예교수는 윤치호가 단순히 애국가를 번역한 것이며,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저작'이라는 표현을 썼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준혁 한산대 역사학과 교수와 안민석 [[새정연]] 의원은 부자였음에도 상세한 가계부를 쓰는 등 자신에 대한 세밀한 기록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일기장에 애국가와 관련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윤치호설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3.1운동]] 당시 애국가가 널리 불려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윤치호가 일기를 썼으나 역시 애국가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윤치호설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되고 있다.
  
 
==== 안창호설 ====
 
==== 안창호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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