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 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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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 수교대한민국소비에트 연방이 수교하는 것을 말한다.

배경[편집]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올랐을 때 소련 경제는 이미 활력을 잃었고 특히 소비재와 식량이 부족한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에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했고, 탈 이데올로기적인 "신사고 외교"를 주창했다. 한편,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수교 과정[편집]

서울이 8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이후 북한은 서울 올림픽이 아니라 조선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 평양과 공동 개최를 해서 서울·평양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는 등의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남한과 IOC는 일부 종목의 평양 개최를 제안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1987년 북한이 IOC의 최종 중재안을 거부했다.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공산진영의 참가가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자유진영 국가들이 불참해 80개국,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공산진영 국가들이 불참, 140개국이 참여한 상황이었다. 특히 소련은 공산권의 맹주로서 소련이 불참한다면 공산 진영 대부분이 불참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렇다면 84년에 이어 88 올림픽도 반쪽 자리 올림픽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1월 11일, 소련은 서울 올림픽 참가를 공식 발표했다. [1] 사실 소련 입장으로서는 이미 4년 전에 불참한 상황이었으므로 내부적으로는 서울 올림픽 참가를 이전부터 정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1988년 8월 28일, 박철언 대통령 정책보좌관이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했다. 그는 소련을 떠나기 하루 전인 9월 8일, 루킨 소련 외무부 차관보를 통해 노태우의 친서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소련의 볼쇼이 발레단(8월 31일 1진, 9월 1일 2진 내한)이, 9월 12일에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9월 12일 내한)와 볼쇼이 합창단이 내한 공연을 가져 문화 교류를 가졌다.[2][3][4][5]

8월 19일, 소련은 한국에 임시 영사 사무소를 개설했고, 이 사무소는 서울 올림픽이 끝난 10월 10일 철수됐다.[6][7][8] 특히 이를 위해 양국은 일본 도쿄의 양국 주일 대사관에서 공문을 통해 합의했는데, 이는 양국이 합의한 최초의 외교 문서였다.[9]

9월 16일, 고르바초프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을 통해 한반도 정세가 개선되어, 남한과 경제적으로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했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서울 올림픽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1월 10일 열린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남한과의 긍정적인 관계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10]

이듬해인 1989년 4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 사무소(13일)와 소련 상공회의소 서울 사무소(3일) 개설됐다.[11][12] 11월에는 양국 무역 사무소에 영사처를 두기로 잠정 합의했고, 12월 8일 이를 공식 발표했다.[13] 이듬해인 1990년 2월 22일 코트라 소련 사무소에 한국 영사처가[14], 3월 19일에는 소련 상공회의소에 한국 사무소에 영사처가 개설됐다. 무역 사무소에 영사처가 설치됐다는 점 등 형식면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외교관 특권을 누리며 외교관 기능을 수행하기로 했다. 양국은 실질적 영사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90년 3월 20일에는 김영삼 민주자유당 최고위원과 박철언 정무제1장관 등 정부와 여당 대표단이 소련을 방문해 노태우의 친서를 전달했다. 한국은 소련에 한소정상회담을 제의했고, 5월 22일 IAC 총회 참석을 이유로 서울을 방문한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고르바초프가 한소 정상회담에 동의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도브리닌은 오랜 기간 주미 대사를 지냈으며, 고르바초프의 외교 특별 보좌관을 지내고 있었다.

미소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6월 4일, 양국 정상은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이 끝난 후 노태우는 고르바초프에게 사진을 찍자고 권했으나 고르바초프가 이를 거절하다 승낙했다. 이에 대해서는 "소련에는 공개하지 않겠다"는 도브리닌의 이야기를 듣고 승낙했다는 이야기[15]와 이대로 사진 한 장 없이 헤어지면 회담이 실패한 것으로 알려질 것 아니냐는 노태우의 이야기를 듣고 승낙했다는 이야기[16]가 있다. 8월 양국 정부대표단 회의에서 양국은 선 수교 후 경협 원칙에 동의했고 한소 국교 수립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8월 31일에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17] 소련 외무 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첸지천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셰바르드나제는 한소 수교가 있을 것임을 중국에 알렸다.[18] 당시 양국은 수십년간 지속되온 중소분쟁을 끝내면서 관계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특히 지난해 5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해, 30년만의 중소 정상회담이 열렸었다.[19] 이어 9월 2일 셰바르드나제는 북한에 한소 수교를 통보하기 위해 평양을 찾았다. 그는 김영남에게 한소 수교가 불가피함을 통보 했으나 북한의 반응은 신경질적이었고, 김일성과 만나고 싶다던 셰바르드나제의 요청은 김이 평양에 없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북한에서 수모를 당하고 온 셰바르드나제는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다.

9월 30일, 최호중 외무부 장관과 셰바르드나제는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회담을 가졌다. 원래는 9월 30일 발표, 수교일은 1월 1일로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 측은 수교일이 91년 1월 1일로 된 것과 공란으로 된 것 두 장을 준비한 상태였다. 최호중이 서로에게 좋은 일을 굳이 미룰 이유가 없다면서 셰바르드나제에게 오늘을 수교일로 하자고 설득했고, 안그래도 북한에 냉대를 받은 셰바르드나제는 이에 동의했다. 소련 측은 원래 91년 1월 1일 수교하기로 한 문서만을 가지고 있어서 즉석에서 91년 1월 1일에 사선을 긋고 90년 9월 30일을 써 넣었다. 러일전쟁으로 양국간 국교가 단절된 지 86년만의 일이었다.

선언문[편집]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 코뮤니케
대한민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양국 간 여러 분야에서 우호관계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갈 것을 희망하여 1990년 9월 30일부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양국 관계가 유엔 헌장에 따라 주권 및 영토 보전의 상호 존중 원칙,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 완전한 평등 및 호혜의 원칙에 기초할 것임을 선언한다.

양국은 이 조치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하며, 각자의 제3국과의 관계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20]이라는 전제하에 이를 추진하고 있다.

양국은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외교공관을 교환 설치한다.

양국은 양국의 수도에 상호 외교공관을 설치하고 양국 공관이 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한다.

1990년 9월 30일 뉴욕에서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각각 2부씩 작성되었으며 이 두 원문은 동등히 정본이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최호중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위하여: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21]

북한의 반응[편집]

북한은 달러로 팔고 사는 외교관계라는 1990년 10월 5일 자 노동신문 논평[22]에서 "소련은 미국과 함께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있는 나라이며 특히 소련은 북한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인데 이제 와서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것은 한반도 분단을 영구 고착화 하는 것이다. 특히 소련은 23억 달러에 사회주의 대국으로서의 존엄과 동맹국과의 신의를 23억 달러에 팔아 넘긴 것"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을 했고 이제 북소우호조약이 휴지조각이 되었으니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겠다라는 협박도 있었다.

수교 이후[편집]

1990년 12월, 소련을 방문한 노태우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갖고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했다. 이 때 양국간 경협(경제협력)차관을 30억 달러 규모로 합의했고,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정부 대표단 회의에서 3년간(’91~’93) 은행단 차관 10억 달러, 소비재 차관 15억 달러, 자본재 차관 5억 달러 등 30억 달러에, 리보금리에 1.25~1.375%(연체이자는 L+1.5%)를 가산,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이 결정됐다.

그리고 91년. 한국이 14억 7천만 달러를 제공한 상태에서 소련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채무는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에 넘어갔다. 러시아는 3.7억 달러를 현물로(불곰사업 2.1억 달러, 헬기 0.7억 달러, 원자재 0.9억 달러) 갚았으나 러시아의 경제는 어려운 상태였다. 2003년 9월 18일, 한러 양국은 채무재조정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채무액 22.4억 달러중 6.6억 달러를 탕감한 15.8억 달러를 리보금리에 0.5%를 붙여서 23년간 연 2회 7000만 달러씩 상환하기로 하였다. 이 중 2.5억 달러에 대해서는 2차 불곰사업이 진행됐다.[23][24][25][26]

주석[편집]

  1. ^ 「蘇 서울올림픽 參加 발표」, 『동아일보』, 1988.01.12., 1면
  2. ^ 「蘇 볼쇼이·모스크바 필 한국온다」, 『동아일보』, 1988.08.08., 1면
  3. ^ 「볼쇼이 발레단 入京」, 『동아일보』, 1988.09.01., 15면
  4. ^ 「볼쇼이 2陣 入國」, 『동아일보』, 1988.09.02., 15면
  5. ^ 「모스크바필」 어제 來韓」, 『동아일보』, 1988.09.13., 15면
  6. ^ 「蘇 20日께 영사사무소설치」, 『동아일보』, 1988.08.03., 1면
  7. ^ 「蘇 領事사무소 개설」, 『동아일보』, 1988.08.19., 3면
  8. ^ 「소련 영사단 귀국 사무실 일단 닫아」, 『한겨레』, 1988.10.11., 1면
  9. ^ 이승곤, 『한국외교의 재발견』, 서울: 기파랑, 2009, pp.219-220
  10. ^ Don Oberdorfer, 이종길 역, 『두 개의 한국』, 서울: 길산, 2002, p.303
  11. ^ 서배원,「韓·蘇 經協시대 본격화」, 『경향신문』, 1989.04.04., 6면
  12. ^ 「소련·폴란드에 무역관 개설 대한무역진흥공사」, 『한겨레』, 1989.04.16., 2면
  13. ^ 「韓·蘇 領事관계 수립」, 『경향신문』, 1989.12.08., 1면
  14. ^ 「駐蘇영사처 업무개시」, 『경향신문』, 1990.02.21., 3면
  15. ^ Don Oberdorfer, 이종길 역, 『두 개의 한국』, 서울: 길산, 2002, p.323
  16. ^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파주: 나남, 2005, p.248
  17. ^ 소련 해체 후 조지아(그루지야) 대통령을 지냈으나 2003년, 장미혁명으로 하야했다.
  18. ^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파주: 나남, 2005, pp.254-257
  19. ^ 그리고 천안문 사태는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20. ^ 북한을 의식한 것인데 북한의 반응은(...)
  21. ^ 외교통상부, 『한국외교 60년:1948~2008』, 외교통상부, 2009. p.387
  22. ^ 「한소수교관련 노동신문 논평(全文)」, 『연합뉴스』, 1990.10.05.
  23. ^ 개발협력과, 「대러시아 경협차관 상환 실무협상개최」, 『재정경제부』, 2002.06.19.
  24. ^ 개발협력과, 「대러 경협차관 채무재조정 협상 타결」, 『재정경제부』, 2003.06.24.
  25. ^ 개발협력과, 「대러 경협차관 채무재조정 합의문 본서명식 개최」, 『재정경제부』, 2003.09.23.
  26. ^ 김병호, 『속 깊은 마트료슈카』, 서울: 공감, 2010, p.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