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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상소를 올린바 있다. [[세조]] 때에는 경창부윤,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공신의 적장자로 강녕군에 봉해진 뒤 숭정대부까지 승진하였다. 이후 [[1466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라고 상소를 올린바 있다. [[세조]] 때에는 경창부윤,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공신의 적장자로 강녕군에 봉해진 뒤 숭정대부까지 승진하였다. 이후 [[1466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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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63권으로, 전 좌랑으로서 [[소나무]] 가지에 있던 감로를 세종에게 바친 것으로 등장한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3030_003 세종실록 63권, 세종 16년 3월 30일 정미 3번째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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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1일 (목) 20:25 기준 최신판

홍원용(한자: 洪元用, ~ 1466년)은 조선문신이다. 시호는 장간(한자: 章簡)이다.

생애[편집]

본관은 남양으로, 판서였던 홍여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때 좌랑을 거쳐 사헌 지평이 되었다. 문종 때는 지사간원사가 되었으며, 단종 때 호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호조참의 직위는 당상관의 직위인데다 상피의 예에 해당하여 사헌부와 원효연, 윤기견 등이 제수를 거두거나 개정하기를 여러번 청했고, 홍원용 스스로도

"신이 별로 재능도 없으면서 한갓 훈신(勳臣)의 후예로 인해 성은(聖恩)을 많이 입어, 본월(本月) 초8일에 신에게 본직(本職)을 제수하셨으니, 분수를 헤아리며 바라는 바에 넘쳐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지금 헌사(憲司)에서 신의 수직(受職)이 옳지 않다는 사유(事由)로 재삼 진달(陳達)하니, 놀랍고 두려움이 매우 더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직(職)을 해임하도록 명하시어 여망(輿望)을 후(厚)하게 하소서."

단종실록 9권, 단종 1년 11월 29일 신사 3번째기사

라고 상소를 올린바 있다. 세조 때에는 경창부윤,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공신의 적장자로 강녕군에 봉해진 뒤 숭정대부까지 승진하였다. 이후 1466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기타[편집]

  •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63권으로, 전 좌랑으로서 소나무 가지에 있던 감로를 세종에게 바친 것으로 등장한다.[1]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