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즙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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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즙 파동1964년 중학교 입시에서 일어난 복수 정답 논란 사건이다.

상세[편집]

1964년 12월 7일, 1965학년도 중학교 입시가 치러졌다. 시험 종료 후 복수 정답이 무려 20개의 문제에서 인정되는 일[1]이 있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즙 파동이란 이름의 원인이 된 것은 자연 과목의 18번 문제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① 찹살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②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③ 이 밥에 물 3L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④ 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⑤ 짜 낸 국물을 조린다.

18. 위 ③과 같은 일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 디아스타제 ② 무즙 ③ 꿀 ④ 녹말

발표된 정답은 ①번 디아스타제였으나, ②번을 선택한 학생의 학부모들로부터 무즙 역시 정답이라는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포함되어 있는데다, 당시 교과서[2]에서도 무즙에 디아스타제가 들어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교육위원회에서는 12월 9일 문제를 무효화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①번을 선택한 학생의 학부모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결국 다시 번복하여 ①번만을 정답으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낙방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무즙을 넣어 만든 을 담은 을 서울시 교육위원회에 가지고 와서 항의하기까지 했다.[3][4]

이후 사건은 1965년 2월에 학부모 40명이 법정에 소를 제기하면서 법정공방으로 이어졌고, 3월 30일 고등법원 판결로 원고 승소하면서 종료되었다. 단 이런 혼란 속에서 일부 부유층과 지도층 자녀의 부정 입학이 은근슬쩍 자행되기도 했다.

영향[편집]

당시 과열되는 중학교 입시에 대한 문제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사건이 일어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늘어놓기와 이히 문제[5] 논란이 벌어졌고, 여기에 창칼 파동으로 정점을 찍으면서 결국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통해 중학교 입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외부링크[편집]

주석[편집]

  1. ^ 前期中學入試(전기중학입시)아리숭한問題(문제)많아 採點官(채점관)들도 갸우뚱
  2. ^ 국민학교 자연교과서 6-2
  3. ^ 꼬리문騷動(소동)…『自然(자연)』18번"무汁(즙)엿 먹어보라"
  4. ^ 이런 행동은 단순히 교육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사를 보듯 당시 서울시 교육감이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면 구제해 보겠다는 발언에서 기인하였다.
  5.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무즙파와 창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