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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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

성재기(1967년 - 2013년 7월 26일?)는 한국의 인권 운동가였다. 아호는 심헌.

1999년 10월 2일부터 사망 직전까지 군 가산점 부활 운동을 이끌었고, 2003년~2004년 연간에는 호주제 폐지 반대운동, 2005년부터는 호주제 부활 운동, 2006년부터는 여성부 폐지 운동을 이끌었다. 다른 남성운동가들도 군 가산점 부활을 요구했지만 그는 군 가산점 부활론자 중 거리 가두집회, 피켓시위, 인터넷 댓글논쟁, 트위터 등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하여 유명해졌다.

강경파 페미니스트 및 극단주의 페미니즘, 남성혐오 등만을 비판하던 초창기의 남성운동과는 다르게 페미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 여성부 폐지 운동, 여성단체 통폐합 운동, 남자들에게 가정에서 탈출하자는 남성해방운동 등 과격한 남성 운동을 주도하였다.

생애[편집]

대구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륜중, 대륜고나 영남대는 대구지역에서는 꽤 저명한 학교에 속한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한다. 1993년부터 대구 시내에서 보험회사 직원으로 활동하다가 2000년 토마스 맥플라이 헤드헌팅사라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대구 효목동에서 차렸고, 근처 대구 동구의 양대나이트클럽도 운영했지만 2006년 11월 26일부로 모두 처분했다.

2003년~2005년에는 호주제 폐지 여론이 나타났는데, 이때 정채기는 호주제 폐지에 찬성했다. 호주제 폐지에 정채기, 한지환 등 일부는 찬성했지만 성재기는 호주제 폐지 반대, 호주제 유지를 주장했고,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자 그는 적극적으로 남성 해방을 말했다.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자, 남자들도 결혼에 연연하지 말자고 외쳤다.

2011년 1월 24일부터 2013년 1월까지 국제결혼 중개를 했다. 그는 무료로 돈을 받지 않고 국제결혼을 중매했으므로, 몇건의 국제결혼 성공 사례가 있었지만 국제결혼 중매업체들의 소송 제기 등으로 약 2년만인 13년 1월 31일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에서의 과격한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일부 트위터 발언이나 방송 발언은 상대 패널이나, 상대 트위터가 성재기에게 특이한 정신세계의 소유자 라는 식으로 인신공격을 시작하여 일부러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다소 점잖게 여성 권리가 신장되지 않았느냐는 정채기 교수의 아침마당 패널 발언이나 백분토론, 심야토론 발언에도, 과거 여성이 피해를 당한 것에 울분을 품는 여성 시청자의 항의전화로 방송 중도하차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성재기는 더 강경한 발언으로 여성부 무용론, 과거 여성이 당한 피해와 현재 2040대 여성이 당한 피해는 무관하다며 조목조목 반박 등으로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경기도 제2청의 의정부, 일산 지역 버스의 여성전용석이 문제라고 경기도 제2청사에 항의전화를 걸어서 폐지시키는가 하면, 대구시 지하철의 여성전용칸이 남성 차별이라며 대구철도공사에 항의전화, 민원을 넣어 폐지시키기도 했다.

제천지역에 사는 남학생 회원의 제보를 받고는 제천 여성 도서관은 3번을 항의 방문, 부지 제공자의 유언이 여학생들의 공부장소로 제공하라가 아니라 가난한 학생들에게 공부 장소로 제공하라는 점, 아기 엄마도 5세 미만의 미취학 남자 아동을 데리고 들어가도록 허락하라며 퍼포먼스를 벌였다. 결국 제천시청 문화관광과가 손을 들어 여성도서관 1층 열람실을 남성, 남학생에게도 공개했다.

여성단체, 여성부에 대한 안티 운동[편집]

1994년 한국에 남권운동과 남성 인권 운동을 처음 소개한 정채기나 그밖에 한지환, 김재경, 이경수 등과는 달리 여성부 폐지 운동, 여성단체 무용론, 여성단체 통폐합 등을 주장했다.

강경파 페미니스트 및 극단주의 페미니즘, 남성혐오 등만을 비판하던 초창기의 남성운동과는 다르게 그는 페미니즘 자체의 용도폐기론을 주장했다.

정채기 교수는 주로 아버지 운동, 가부장제 반대, 남편의 가사 노동 참여, 좋은 아빠, 다정한 아빠 되기 운동을 하였다. 그에 반해 성재기는 군 가산점 부활, 가부장 권위 확립을 주장하다가, 호주제 폐지 확정 이후 남성 해방론을 주장하며 이혼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이혼할 자유,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했다. 한편 이혼 견해를 놓고는 남성연대의 창립자 성재기와 갈등했다.[1]

또한 성재기는 한국형 페미니즘이라 하여 남녀평등,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 남자가 책임져주기를 바란다고 비꼬았다. 그는 남자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여자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게 무슨 남녀평등이나며, 여자가 안정된 직장을 갖고 남자를 책임지면 안되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남자가 집과 차를 마련하라는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

남녀평등, 양성평등을 원하면서도 남자에게 기대기를 원하던 일부 여성들이 독신자로 나갈 것이며, 주변 친구들의 연애실패담, 결혼 실패담만 귀에 집어넣고는 편견만 강화시킬 것이라는 말까지 했는데 일부 맞는 것 같기도.[2]

기존에 여성에게 기회가 제한되었던 것만큼 여성에 대한 일부 할당제를 주장하던 다른 남성 인권 운동가들과는 달리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며 모조리 반박, 여성할당제에 대해 집요하게 걸고 넘어졌다. 그가 여성 할당제를 집요하게 걸고 넘어진 원인은 성재기 생전에 스스로 밝힌 것처럼 군 가산점제 폐지, 호주제 폐지가 원인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 여성부 폐지 운동, 여성단체 통폐합 운동, 남자들에게 가정에서 탈출하자는 남성해방운동론을 외쳤다.

자금 부족[편집]

2011년 1월 행정안전부로부터 시민단체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색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그의 주장을 거부하는 시각은 크게

  • 아직도 남성은 무조건 강자라는 시각
  • 여성에 대한 온정적 보호주의
  • 과거 여성이 차별을 받았으니 여성에 대한 할당은 당연하다는 시각

등이었다. 결국 2012년 대선에서의 박근혜 지지 선언 이후, 그가 좌파 남성은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루머와 유급 알바를 실제로 고용했다가 유급 알바가 월급을 밀렸다고 남성연대 사무실 프린터를 갖고 나온뒤 디씨, 일베저장소 등에 인증사진 올리는 등의 사건이 뻥뻥 터지면서 회원수가 줄어들었다.

집세와 전기, 수도료 등이 밀렸고, 여성단체나 여성부 외에도 각계에 포진된 여성계 인사들의 인맥과 영향력에 밀리게 되자 그는 자금모금을 마련으로 한강 투신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했던 그는 현장에 가기 직전 조덕배의 노래를 들으면서 불안감을 겨우 달랬다 한다. 7월 26일 오후 3시 사진 하나 남기고 투신했고, 7월 29일 마포대교 남단 100m 지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적을 만든 원인[편집]

그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 외에도 온정주의자, 여성에 대한 온정적 보호론자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서로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성재기의 활동은 마초이즘으로 몰렸지만, 남자도 책임감을 버리자,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자, 남자들도 결혼에 연연하지 말자는 주장은 오히려 급진적인 남성 해방론에 가깝다.

성재기는 한국의 결혼이 매매혼이라며 집 한채, 차 한대 사는 돈이 얼마나 드느냐며 그는 2000년대 청년층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결혼, 맞벌이를 해서 내집마련을 하고, 자동차를 샀다며, 무조건 준비된 상태에서만 시작하려는 청년층의 사고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눈높이를 현실적으로 낮추지 못할 것이면 평생 혼자 살고, 나중에도 노인복지 같은 것에 기대지 말라! 등 강경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강경한 발언에 페미니스트, 온정주의자, 온건파 및 정치적 올바름 신봉론자들과 갈등 원인이 됐다. 물론 성재기도 생전 그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남자 동성애자인 게이, 트랜스젠더도 불쌍한 피해자라며 감싸안았다. 그러나 일부 동성애자들은 성재기를 싫어했는데, 동성애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을 아군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내에서도 보수세력이나 기독교계통의 페미니스트들은 동성애자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정확히는 페미니즘 중에서도 맑스주의 혹은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등과 연계된 고전적 페미니스트들 일부만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성격이 급하고 괄괄했지만 뒤끝이 없었다. 그러나 급한 성격과 괄괄한 성격도 적을 만든 원인.

기타[편집]

11월 26일 여성부 폐지운동 클럽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대구역 광장에서 회원들을 모았다. 초기에는 카페 수준이었지만 이게 규모가 커지면서 2008년에는 정식으로 남성연대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남성연대는 2011년에 가서야 정식 시민단체로 인정받았다.

정치적 올바름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 신봉자들을 대단히 혐오하였다.[3]

소설가 이문열, 소설가 이윤기의 열혈 팬이었다. 이문열의 작품은 모두 읽었고 한때 이문열 팬클럽의 대표를 맡았다. 이윤기의 작품은 이윤기의 그리스 신화 관련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작품을 읽고 한국 번역계에 한 획을 그었다며 그를 존경한다 밝혔다.

주석[편집]

  1. ^ 성재기는 군 가산점 폐지 이후 적극적으로 남성이 가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 성재기는 남자들은 남자들 대로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에 빠져서 망상하거나 집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 ^ 정치적 올바름 신봉자들을 위선자, 사기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사고방식이라고 지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