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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llang|ko-Hani|朝鲜族}})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기에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한국계 중국인이다. 2010년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중국에는 183만 929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랴오닝 성]] 등 중국 동북부 지역([[연변조선족자치구]])에 밀집하여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로 [[대한민국]]으로 이민하는 조선족의 수가 급증하면서 중국 내 조선족의 수는 반대로 감소 추세에 있다. 2012년 기준으로 45만 명의 조선족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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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동포'''(在中同胞)[[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민족이다. [[외교부]]의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2023년 기준 210만 명의 재중동포가 있다. 재중동포는 과거에는 해외동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나, [[한국]]에 정착하는 재중동포가 늘어나면서 2019년을 기점으로 재중동포 수가 [[재미동포]] 수에 밀리게 되었다. 중국 국적을 취득한 재중동포는 대부분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랴오닝 성]] 등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다.
  
== 한국 내 조선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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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 재중동포 ==
중국에 살던 조선족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하는 상황이 1990년대부터 지속되고 있다. 대개 식당 종업원, 공장 근로자 등 3D 업종에서 일하고 있으며, 기업가나 유학생도 상당수 있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한국어]]에 능통하면서도 낮은 임금으로 부려 먹을 수 있는 노동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는지라 조선족 채용에 적극적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한국 체류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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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llang|zh|朝鲜族}})이라는 용어는 중국 내에 있는 한국인을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취급하여 부르는 것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2010년 등록 외국인 기준으로 전체 한국 내 조선족의 85%가 [[수도권]]에 있고, [[서울]]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등이 조선족 최대 거주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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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족’은 중국의 입장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재미동포]],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재일동포]]라 부르듯이 ‘중국에 있는 한민족’라는 의미의 '''재중동포'''로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적다.  
  
=== 조선족의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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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언론이나 공식석상에서는 조선족이라는 용어 대신에 재중동포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추세이다.
[[중화사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위대한 중국의 국민이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한민족]]이라는 의식 또한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한국은 땅덩어리가 작다는 점에서부터 일단 깔보고 들어간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위대한 국가인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을 우러러보기는커녕 무시하고 경멸하는 경우가 일쑤이기 때문에 여기서 [[인지부조화]]를 느끼게 된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의 원인이 된다.  
 
  
=== 한국인의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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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일반 중국인보다도 더 싫어한다. 돈이나 벌러왔으면 곱게 돈이나 벌고 갈 것이지, 중국이 한국보다 더 좋네, 어떠네 하면서 돌아다니는 조선족들이 한국인 눈에는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조선족 [[보이스피싱]]이나 강력범죄 사건들 역시 조선족에 대해 부정적인 색안경으로 작용한다. 일부 한국인들은 '''조선족 추방!'''을 주장하며 인터넷상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크게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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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70년대에 [[함경도]] 지역에서 심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자 국경지대에 살던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인구가 적고 땅이 비옥한 [[간도]]지역에 정착한 것이 오늘날 재중동포의 시초이다. 이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던 것이 1885년, 청나라가 북간도 지역 일부를 조선인 개간구역으로 지정, 조선인들의 정착을 허용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조선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885년부터 1910년 [[한일병합]] 이전까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26만 명으로 추정된다.  
  
===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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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의 토지 개혁으로 인하여 농사 지을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비어있는 땅을 찾아서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10년부터 1928년까지 48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이주하였을 정도로 조선인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였다.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 중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망명 독립투사들도 많았다. 1920년 6월에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봉오동 전투]]가 간도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은 이미 한국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족들을 무조건 추방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의 현실에서, 이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편이 더 현명한 길일 것이다. 조선족들에 대한 배척은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 뿐이며, 이는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인의 ‘한민족 동포 사상’(핏줄이 한민족이면 동포!)과 조선족의 ‘중화사상’(나는 중국인이다)의 충돌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한민족이지만 중국인인’ 조선족의 특수한 처지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범죄에 관련해서 말하자면, 조선족의 범죄율은 다른 외국인들과 비교하여 높은 편이 아니다. 다만 국내 거주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조선족이다 보니 범죄의 횟수가 많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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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만주개척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만주국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 정책에 따라 재중동포의 수는 1945년에 216만 명까지 급증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식량수탈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일본군과 독립군이 충돌하는 만주국의 사회상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으며 여기에 민족 간 갈등까지 겹치면서 간도 내 조선인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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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창설된 한국인 무장독립단체인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으며, [[중일전쟁]]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되었다.
* [[백청강]] - 2011년 MBC 《위대한 탄생》 우승자
 
* [[오원춘]] - [[수원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
 
  
[[분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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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216만 명 중 절반 정도(100만 여명)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중국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중국에 남은 한국인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해방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을 배격하고,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공산당을 도와서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재중동포는 새로운 중국 건설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서, 중국 공민으로서 상당한 대우를 받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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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내 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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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동포는 중국 내에서 상당히 ‘대접받는’ 소수민족에 속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생활수준도 괜찮은 편이고, 정치적으로는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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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으로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의 말과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한글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입시도 [[한국어]]로 보며, 조선 민족교육을 표방하는 종합대학교인 [[연변대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조선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 중에서 문맹률이 낮고 대학진학률이 높은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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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자치구 지역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이기 때문에 기반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2년에 한중수교가 채결되면서 재중동포의 경제상황도 개선되었다.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기업이 재중동포를 채용하고 나섰으며,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조선족 기업도 크게 번창하였다. 한편으로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내 대도시나 [[한국]]으로 이주하는 재중동포가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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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고, 재중동포의 정치활동에도 제약을 두고 있지 않지만 중앙정치계에서 재중동포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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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2024년 1월 13일 (토) 23:34 기준 최신판

재중동포

재중동포(在中同胞)는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민족이다. 외교부의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2023년 기준 210만 명의 재중동포가 있다. 재중동포는 과거에는 해외동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나, 한국에 정착하는 재중동포가 늘어나면서 2019년을 기점으로 재중동포 수가 재미동포 수에 밀리게 되었다. 중국 국적을 취득한 재중동포는 대부분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랴오닝 성 등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다.

'조선족', 재중동포[편집]

조선족(중국어: 朝鲜族)이라는 용어는 중국 내에 있는 한국인을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취급하여 부르는 것이다.

즉, ‘조선족’은 중국의 입장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용어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재미동포,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재일동포라 부르듯이 ‘중국에 있는 한민족’라는 의미의 재중동포로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적다.

근래에 언론이나 공식석상에서는 조선족이라는 용어 대신에 재중동포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추세이다.

역사[편집]

1860-70년대에 함경도 지역에서 심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자 국경지대에 살던 조선인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서 인구가 적고 땅이 비옥한 간도지역에 정착한 것이 오늘날 재중동포의 시초이다. 이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던 것이 1885년, 청나라가 북간도 지역 일부를 조선인 개간구역으로 지정, 조선인들의 정착을 허용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조선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885년부터 1910년 한일병합 이전까지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26만 명으로 추정된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의 토지 개혁으로 인하여 농사 지을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비어있는 땅을 찾아서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10년부터 1928년까지 48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이주하였을 정도로 조선인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였다.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 중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망명 독립투사들도 많았다. 1920년 6월에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한 봉오동 전투가 간도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를 포함한 중국 동북부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만주개척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만주국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이 정책에 따라 재중동포의 수는 1945년에 216만 명까지 급증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식량수탈에 신음하고 있던 조선의 농민들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일본군과 독립군이 충돌하는 만주국의 사회상은 혼란하기 짝이 없었으며 여기에 민족 간 갈등까지 겹치면서 간도 내 조선인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1938년 창설된 한국인 무장독립단체인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으며, 중일전쟁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되었다.

1945년에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216만 명 중 절반 정도(100만 여명)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중국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선택하였다. 중국은 중국에 남은 한국인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해방 이후 벌어진 국공내전(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을 배격하고, 토지개혁을 지지하는 공산당을 도와서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재중동포는 새로운 중국 건설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서, 중국 공민으로서 상당한 대우를 받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중국 내 위상[편집]

재중동포는 중국 내에서 상당히 ‘대접받는’ 소수민족에 속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생활수준도 괜찮은 편이고, 정치적으로는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다.

교육적으로는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의 말과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다. 교육과정에서 한글을 배우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입시도 한국어로 보며, 조선 민족교육을 표방하는 종합대학교인 연변대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조선족은 중국 내 소수민족 중에서 문맹률이 낮고 대학진학률이 높은 편에 속한다.

조선족 자치구 지역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개발에서 소외된 지역이기 때문에 기반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2년에 한중수교가 채결되면서 재중동포의 경제상황도 개선되었다.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기업이 재중동포를 채용하고 나섰으며, 경제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조선족 기업도 크게 번창하였다. 한편으로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서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내 대도시나 한국으로 이주하는 재중동포가 늘어나고 있다.

정치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고, 재중동포의 정치활동에도 제약을 두고 있지 않지만 중앙정치계에서 재중동포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