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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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가는 청계천.
20세기 초, 판잣집이 밀집한 청계천의 모습

청계천(한자: 淸溪川)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서울특별시종로구중구를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다. 총 길이 10.84km, 너비 84m이며 최종적으로 살곶이다리에서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현재 서울특별시 산하에 있는 시설관리공단의 관리하에 있다.

역사[편집]

조선시대[편집]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사람의 손길이 닿게되었다. 당시의 청계천은 가을에는 말라있는 건천이었던 것에 반해 여름철에는 조금만 가 와도 넘쳐 흘러 인근의 민가에 피해를 입히기 일쑤였고, 이에 태종 6년(1406년)부터 7년(1407년)까지 하천의 바닥을 쳐내고 넓힌 후 둑을 쌓고, 태종 11년(1411년) 12월 14일에 개천도감(開川都監, 개거도감(開渠都監)이라고도 함)을 설치하여 이듬해 1월 15일부터 한 달동안 큰 공사를 실시하여 이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루어졌던 공사를 개천, 즉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불렀는데 이것이 그대로 청계천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사 이후에도 흙이 쌓여 계속해서 홍수 피해가 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임진왜란병자호란에는 사람과 가축의 주검이 쌓여 묻히는 등의 일이 있자 영조 36년(1760년) 2월에 21여만명을 동원하여 바닥을 파고 영조 49년(1773년)에는 양안을 전부 석축으로 개축하는 준천 공사를 실시하였으며 준천사라는 기구를 두어 공사 이후에도 준처할 수 있도록 하고 준천사실과 준천소좌목을 지어 이 준천 공사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영조 이후 순조현종, 고종때에도 준설 공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폐수와 오물로 더러워지고 주변에는 빈민가와 창녀촌이 즐비한 상태에 이르자, 일제에 의해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일제에 의해 개천이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한민국[편집]

한국전쟁 이후 악취가 심하고 위생적으로 문제가 심해지자, 1958년 6월에 복개공사를 시작하여 1978년말에 완료하였다.

복원 사업[편집]

비판[편집]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