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7대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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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선거 당시 각 후보들의 포스터들을 살펴보는 시민들

대한민국의 제7대 대통령선거 대한민국에서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배경[편집]

북한 게릴라 요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하였다가 발각되어 28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된 1·21 사태(일명 김신조 사건, 1968년 1월 21일)가 벌어지자, 민주공화당에서는 이를 빌미로 국가안보를 위해 박정희가 삼선에 도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박정희가 3선에 나오기 위해서는 헌법을 고쳐야(삼선개헌) 했는데, 당시는 민주공화당의 의석수가 국회 의석수의 2/3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법대로라면 삼선개헌은 민주공화당에게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지만 야권은 삼선개헌에 대해 박정희 장기집권을 위한 초석이라며 크게 반발하였다. 신민당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전국적인 개헌반대투쟁에 나섰다. 전국 대학가에서도 삼선개헌반대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자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에 모여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은 10월 17일, 3선개헌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국민 투표를 실시하였고, 다음과 같이 최종 확정되었다.

찬성 또는 반대 득표수 %
찬성 7,553,655 67.5
 
반대 3,636,369 32.5
 
무효표 414,014
총 투표수 11,604,038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15,048,925 77.1

3선 개헌이 국민들에 의해 최종 승인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는 박정희로 확정되었다.

한편, 신민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의 세 명의 참신하고 새로운 후보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40대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들은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각자 자신들이 대통령 후보로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젖비린내 나는 정치신인이라며 40대 기수론에 부정적이던 당내 분위기는 점차 반전되어 나중에는 40대 기수론에 환호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당초에는 3선 반대 투쟁을 전두 지휘한 김영삼 원내총무가 대통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당내 비주류파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종의 권력 암투 끝에 2차 당내 대의원 투표 결과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를 극적으로 꺾으면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으로 정해졌다. 김영삼은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김대중 후보를 적극 지지하였다.

  • 1차 대의원 투표
후보자 결과 득표율 득표수
김영삼 2차 투표 진출 47.6% 421
김대중 2차 투표 진출 43.2% 382
이철승 3위 9.3% 82
100% 885
  • 2차 대의원 투표
후보자 결과 득표율 득표수
김대중 선출 51.8% 458
김영삼 2위 46.4% 410
100% 884

전개[편집]

선거는 치열하게 전개되어갔다. 일단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시키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0%를 기록하는 등, 당초 목표를 뛰어넘는 굉장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는 중단 없는 전진을 외치며 중화학 공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내용의 제3차 경제개발계획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삼선 개헌은 영구집권, 독재를 위한 초석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에 대해 이번 선거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며 앞으로 다시는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하지 않겠다고 발언하였다. 그리고 이 발언은 정 반대의 의미로 사실이 되는데...

김대중은 젊은 40대 기수답게 패기 넘치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 중에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것이 많았는데, 향토예비군 폐지, 공산국가와의 외교 추진, 남북한 사이의 비정치적 접촉 시도, 미국, 중국, 일본, 소련 4개국에 의한 한국의 방위 보장 등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김신조 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안보 문제를 건드리는 행동은 별로 현명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처럼 경제, 민주화, 외교, 안보 등이 이슈로 떠오르고 두 후보가 각자 이에 대한 공약을 내걸면서 제7대 대통령선거는 나름 정책선거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의 병폐인 지역감정을 고착화시킨 선거로도 악명이 높다. 야당에서는 호남 푸대접론을 대대적으로 걸고 나오며 경상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씌우게 된다(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 이는 자연스럽게 호남 출신의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에 민주공화당도 신라 대통령론을 외치며 영남지역에서 지역감정 부추기기에 동참하였다(문디가 문디 안뽑고 뭐하노!). 선거 직전에는 민주공화당 측에서 영남 지역에 호남인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적힌 전단까지 살포하는 등 지역감정 부추기기는 엽기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선거 결과[편집]

참신한 새 인물이 신민당에서 발굴되어 치열한 선거전을 펼쳤으나, 정작 결과는 별로 치열하지 않았다. 94만여 표 차이로 박정희가 김대중을 크게 따돌리고 지난 선거와 다름없이 손쉬운 승리를 따냈다. 예상 밖의 큰 표차 패배를 당한 신민당 측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정의하는 등 크게 반발하였다.

후보자 정당 득표수 %
박정희 민주공화당 6,342,828 53.19
 
김대중 신민당 5,395,900 45.25
 
진복기 정의당 122,914 1.03
 
박기출 국민당 43,753 0.36
 
이종윤 자민당 17,823 0.14
 
무효표 494,598
총 투표수 12,417,816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15,510,316 79.8

지역별 득표율[편집]

지역 / 시 · 도
박정희
민주공화당
김대중
신민당
득표수 % 득표수 %
수도권 서울특별시 805,772 39.95% 1,198,018 59.39%
경기도 687,985 48.86% 696,582 49.47%
강원도 502,722 59.84% 325,556 38.75%
충청도 충청북도 312,744 57.31% 222,106 40.70%
충청남도 556,632 53.49% 461,978 44.39%
호남
(전라도)
전라북도 308,850 35.48% 535,519 61.52%
전라남도 479,737 34.43% 874,974 62.80%
영남
(경상도)
부산직할시 385,999 55.65% 302,452 43.61%
경상북도 1,333,051 75.62% 411,116 23.32%
경상남도 891,119 73.35% 310,595 25.56%
제주도 78,217 56.85% 57,004 41.43%
지역별 최다 득표자는 진한색으로,
4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한 후보는 연한색으로 배경을 처리하였다.
지역별 득표수

제7대 대선의 지역별 구도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는 지역별 구도가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도시에서는 야당(김대중) 득표율이, 시골에서는 여당(박정희) 득표율이 증가(=여도야촌, 與都野村)하였다는 점이다. 심화된 지역별 구도는 김대중이 주도한 지역감정 부추기기의 탓이 컸다. 여도야촌 현상은 도시 지역에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독재화를 우려하던 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고, 반대로 먹고 살기 급한 농촌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경제발전 성과에 더욱 주목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 수도권: 여도야촌 현상에 의해 지난 대선에 비해, 도시 지역인 서울에서는 야당 득표율이 8% 증가하였고, 반대로 경기도에서는 여당 득표율이 8% 증가하였다. 결론은 퉁쳤다.
  • 영남: 여도야촌 현상에 의해 지난 대선에 비해, 도시 지역인 부산에서는 야당 득표율이 13% 증가하였고, 반대로 경북, 경남에서는 여당 득표율이 각각 12%, 4%씩 증가하였다. 민주공화당 측에서도 영남지역에서 지역감정 부추기기에 동참한 것은 사실이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결론은 퉁쳤다.
  • 호남: 김대중의 지역감정 전략은 탁월하게 먹혀들어가, 지난 대선에서 미세하게 야당 편을 들어주었던 호남 지역에서 대량 득표에 성공하게 된다. 이 선거를 계기로 호남지역은 야당의 표밭으로 고착화되었다.전설의 김대중 득표율 97%를 위한 준비단계 이로서 영남=여당, 호남=야당이라는 공식이 완성되었다.
  • 충청: 역시 여당(박정희)의 득표율이 증가하였다. 특히 충남 지역이 여당 편으로 돌아선 것은, 충남 출신의 윤보선과 전남 출신의 김대중의 차이로 분석된다.
  • 강원: 역시 여당(박정희)의 득표율이 증가하였다.

선거 이후[편집]

이로서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하였고,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예상 밖으로 큰 표 차로 패배한 신민당은 이 선거는 부정선거다! 이번엔 진짜 부정선거다! 라며 개거품을 물었고, 이로 인해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민주공화당 측에서는 유권자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거금을 살포했다. 신민당도 뿌린 돈 액수가 작다 뿐이지, 선거운동을 깨끗하게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이때는 다 그랬다.

그리고 1년 뒤, 야당 측에서 그토록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암흑기에 빠뜨린다. 이로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