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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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1996년 5월)

김영삼(金泳三, 1927년 12월 20일~2015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4대 대통령을 역임한 민주화 운동가이다. 1992년 당선되어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까지 5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이 기간동안 정부의 이름은 군부출신이 아닌, 일반인이 이끄는 정부라고 하여 문민정부(文民政府)라고 이름 붙여졌다.

생애[편집]

초기[편집]

김영삼은 경상남도 거제 출신으로서,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 출생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김영삼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가한 바 있다. 1954년 김영삼은 26세의 어린 나이(최연소)로 민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이후로도 거제, 부산 지역구의원으로 여러번 선출되었다(9선의원)[1]

대통령 선거[편집]

전두환의 임기라고 쓰고 독재라 읽는다가 끝난 1987년, 다음 대통령을 뽑기 위한 대한민국 최초의 직접선거가 열렸다. 당시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후보로 올랐다. 오랜 군부독재 후의 선거인 만큼 전두환의 수하인인 노태우만큼은 당선이 안 되기는 개뿔이고 같이 군부독재 반대를 외쳤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표를 나눠갖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1990년, 김영삼은 3당 합당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질러버린다. 3당 합당이란,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든 것이다.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결국 1992년 치러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득표율 42%로, 득표율이 34%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문민정부[편집]

금융실명제[편집]

김영삼 정부(문민정부)는 정부와 경제 전반에서의 개혁을 시도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투명한 경제질서를 만들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하였다.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를 할 때, 반드시 실명으로 거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서, 국세청에서 자금의 출처를 조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부정, 부패 자금의 활동 통로가 되던 금융시장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금융실명제는 과거 정부에서도 논의된 바 있으나 무산된 바 있었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는 정보가 새어나갈 것을 우려하여 측근 몇 명들과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발표 과정에서도 국회의 논의를 거칠 경우에는 검은 돈이 세탁될 수 있다고 우려하여, 발표 역시 8월 12일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명령권을 발동하여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물론 이후에는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법률로 전환되었다.

하나회 숙청 및 쿠데타 처벌[편집]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과 함께 12.12 군사 쿠데타 등을 거행한 하나회의 회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측근 몇 명들과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96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군사반란,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그제의 적이 어제의 친구가 되었다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삼은 수천명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으며, 특히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기소된 민주열사들을 사면시켰다.

좋지 않은 결말[편집]

김영삼은 임기중 반 부패 캠패인을 벌이며 재벌의 부정, 부패 척결에 앞장섰으나, 정작 그의 둘째 아들인 김현철이 비리를 저질러 1997년 5월 17일 구속되었다. 이는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측근 몇명들과 주요 개혁을 진행한 그의 스타일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이 일로 김영삼은 물론이고, 정부 전반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7년 말에는 한국은행의 외한보유고가 0원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997년 12월, 한국은행은 IMF로부터 빚을 져오게 되었다. 흔히 IMF 사태로 잘 알려져 있는 이 기간동안에는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고 엄청난 수의 노숙자들이 생기는 등,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연도별 행보[편집]

1993년[편집]

대통령 취임 첫 해인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때 90%를 넘는 경이로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고위공직자의 재산이 공개되고, 강력한 부패 척결 정책을 실시하여 실제로 정제계의 핵심적인 사람들이 구속되자 국민들이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에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에 "우리나라가 공산국가가 아닌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반대도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하며 지지율이 너무 높은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1994년[편집]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94년 초 80%대에서 94년 말에는 40%대 까지 하락했다. 지나친 독선주의와 말 바꾸기, 사과는 하지만 반성은 하지 않는 정부에 국민들이 점차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라운드 당시 쌀 개방은 반드시 막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을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 등의 대형 사고가 여럿 발생한 점도 민심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1995년[편집]

지지율의 하락세가 지속되어 지지율이 30%대 까지 떨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의 부족한 리더쉽이 문제가 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면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 1회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민주자유당은 선거 직후 좋지 않은 이미지를 씻어보고자 신한국당이라는 명칭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1996년[편집]

지지율이 어느정도 안정되어 30~40%에 머물렀다. 이러한 지지율의 회복세는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추진했던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이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 경복궁을 복원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기소시켰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이유로 국민학교라는 이름 대신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쓴 것도 바로 이 때(1996년) 부터였다.

1997년[편집]

1997년 1월 이른바 한보사태라는 대형 비리 사건이 터졌는데, 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아들인 김현철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그 영향으로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뒤이어 삼미그룹, 진로그룹, 기아자동차가 부도나는 등 기업들의 줄도산이 일어났으며, 임기말에는 정부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준 IMF 사태로 8.4%라는 초라한 지지율로 퇴임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며 김영삼과의 관계를 끊었다.

각주[편집]

  1. ^ 한국 헌정 역사상 최연소 의원, 최다선 의원 기록은 모두 김영삼이 가지고 있다. 2004년, 9선 의원 김종필이 자민련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으나, 탄핵 역풍을 맞고 낙선함에 따라 정계를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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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