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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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 말의 계몽운동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1948년 8월부터 1960년 4월까지 3번의 대통령 임기를 지냈으며 그의 임기는 냉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상당히 굴곡져 있다. 자(字)는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수반이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국민들에 의해 축출됨으로서 대통령 임기를 끝마쳤다(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초기생애와 경력

초기생애 (1875–95)

이승만은 1875년 4월 18일, 황해도에서 한 가난한 농촌 집안의 6대 독자-사실 2명의 형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에 천연두에 걸려 모두 죽었다-로 태어났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다. 이승만이 2살이던 1877년에 이승만 가족은 서울로 이사하였다. 양녕대군의 사당이 있던 우수현 언덕 남쪽에서 살았는데, 아호 우남은 이 우수현에 있었다 해서 지은 아호이다.[1]

서울에서 이승만은 낙동과 도동에 위치한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9살 때 천연두에 걸려 눈이 멀 뻔 했으나 그의 아버지 이경선이 미국 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에게 데려갔고 알렌의 치료를 받고 나았다. 어릴 때의 이 경험은 이승만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미국을 동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결과로 과거시험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승만은 여기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말,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창립한 협성회에 참가하였다. 협성회는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운동단체로서, 이 곳에서 이승만은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의 집필을 담당하였다.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이승만은 학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95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독립운동 (1896–1904)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복수 계획을 세웠으나, 한 미국인 의사의 만류로 마음을 돌렸다. 이승만은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단체를 통해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일본제국러시아제국의 침략 야욕과 대한제국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는 여러 항쟁을 이끌었다. 1898년, 정부 산하의 법률자문기관인 중추원에 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승만은 박영효 일가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1899년 1월, 경무청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이승만은 감옥살이 20일 째에 탈옥을 감행했으나, 곧 잡혔고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청일젼긔》, 《독립정신》, 《신영한사전》, 《뎨국신문》 등의 출판물을 번역하고 편집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안면경련을 일으키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04-10)

1904년,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발발하면서 민영환의 도움으로 특별 사면되었다. 1904년 11월, 민영환과 한규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5년 8월, 이승만과 윤병규는 미국 뉴햄프셔 포츠머스에서, 존 헤이 미 국무장관시어도어 루즈벨트 미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이 때 미국 측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과는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5년 9월 5일에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일본 사이에 맺어진 포츠머스 조약에는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며 학업에 전념하였다.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었다.

임시정부 활동 (1910-45)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치하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YMCA 간사로 활동하며 기독교를 선교하였다. 1912년, 일본총독부가 한국독립인사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 잡아들인 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1912년 M.C.Harris 등 미국의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신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추천하면서, 이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2]

미국에서,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에게 105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선처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결과는 얻지 못했다.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위치한 한인중앙학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태평양잡지》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1918년, 그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동안, 이승만은 군사력을 키워 이를 바탕으로 무력항일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이 때문에 단체 내에서 갈등을 빚었다. 1918년 12월,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으나, 파리로 가려는 계획은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파리로 가는 대신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한인대표자대회를 열고 한국의 독립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이승만은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상하이에 위치한 한국임시정부국무총리으로 추대되었다. 6월에는 대한공화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공문을 각국에 보냈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였다. 9월 6일, 이승만은 상하이의 한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내의 갈등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대통령 업무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미국으로 되돌아와 워싱턴 회의에 참석, 한국의 독립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디시 돌아와 출판, 구미위원부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교육, 종교 관련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상하이로 송금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1924년 11월에는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임정 탄핵과 복귀

1925년 3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규탄하며, 대통령직에서 탄핵시켰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스스로를 한성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일컬었으며 구미위원회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34년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이곳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오스트리아 여인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임시정부에서는 구미위원부 폐쇄령을 내렸지만 이승만은 거부했고 도리어 미국의 교민단체들에게 임정으로 송금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1928년에는 박용만[4]북경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이구서에게 암살당하자 안창호의 국민회와 이승만, 서재필 등은 임정을 규탄하는 사설들을 미국내 한인 신문인 삼일신보에 기고했다. 삼일신보는 미국내 한인 신문 중에서도 국민회회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신문이었다. 김구는 편지를 보내 박용만은 밀정이라서 살해한 것이니 형님은 서재필과 안창호 등을 설득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5]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한다.

1933년 3월 6일 이동녕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면서 이승만을 임정 국무위원으로 위촉했다.[6] 그때가지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있었으며, 8년만에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 2일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이승만은 신익희 등과 함께 외교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7]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일본을 벗기다)라는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야욕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대로 같은 해 12월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사태가 발발하면서 이 책은 단숨에 미국 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충칭 임시정부 외교부 의장의 직책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 국무부에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45년, 국제기구에 대한 UN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임시정부의 참가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한국 귀국과 정치 입문 (1945–48)

1945년, 일본이 패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미군기를 타고 도쿄로 날아갔다. 한국의 독립 직후 더글라스 맥아더와 비밀만남을 가진 이승만은 1945년 10월에 맥아더의 전용 비행기 The Bataan을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한국으로 되돌아온 뒤,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장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이승만은 강한 반공주의 노선을 주장하였으며 외국세력의 개입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1945)의 합의문 내용인 한국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이 공동 신탁통치 하겠다는 결정에 반발하였으며 동시에 공산당을 매국노로 보고 공산주의자와의 모든 협력을 중단하였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 가입도 거절하였다.

첫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이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에 한국정부는 완전한 독립정부로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이승만은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워싱턴 D.C로 가서 관련 로비 활동을 벌였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1947년 3월에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은 이승만의 반공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시켰다.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새로이 창설되었다. 1948년 5월,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의원선거가 국제연합한국위원회의 감독 아래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이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구 갑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곧 제1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초 제헌 헌법은 내각제안이 유력했으나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가 되었고, 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선거에서 92.3%의 득표율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에 앞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에는 협력할 뜻이 없음을 미리 밝힌 김구는 이 선거에서 6.7%의 득표율로 2위에 머물렀다. 8월 15일, 대한민국이 공식 선포되었다.

대통령 임기

반공주의

대통령직에 오른 이승만은 반공주의에 기초한 법안들을 시행하였다. 여러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던 김창룡 합동수사본부장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사실 그가 처리한 대부분의 공안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다. 그는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내는데 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을 특별히 신임하였으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김창룡은 자신의 반대파를 거리낌 없이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이승만과 김일성전쟁을 통해서라도 상대방을 눌러버리고 한반도를 통일시키기를 원했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중무기를 배치하지 않은 반면, 소련은 북한에 소련제 전투기와 탱크를 전면 배치해두고 있었다.

이렇게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이 심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서 남한을 침공하였다. 6월 26일, 이승만은 도쿄에 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내려왔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이범석의 건의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범석은 비상국무회의에서 한강 철교를 폭파할 것을 안건으로 내놓았고 이의가 없어서 그대로 통과됐다.[8] 한강철교 폭파의 기안자가 누군지는 철저하게 함구되다가 관련 당사자들이 다 죽고 이윤영 목사도 죽기 전에,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자서전을 남겨놓겠다며 이를 기술하였다. 한강철교 폭파는 임시정부 출신 김홍일 중장이 지휘하였다.[9] 북한 인민군은 같은 날 새벽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유력한 설에 의하면) 한강 도하장비 부족으로 이틀을 서울에서 지체한 뒤, 30일에 한강을 건넜다. 북한군의 서울에서의 이틀간의 지체는 이후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동안 이승만은 부산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전시내각 국무위원을 증원, 보선하였으며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대한민국은 국가소멸의 위기를 넘겼다.

재선

한국전쟁은 이승만을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던 대한민국을 기적적으로 지켜낸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가히 대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이승만은 대통령선거 제도를 종전의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에서 직접선거 방식으로 바꾸었다. 한국전쟁 도중에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선거(1952년) 결과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였다.

삼선과 사임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연임 제한 조항을 없애버렸고,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선거(1956년)에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전국적인 대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리한 연임에 반발하는 국민의 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지지율을 확보해가던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 도중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70%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3선에 성공하였다.

이때 자유당은 이승만을 재출마하게 하려고 소와 말까지 동원하며 이승만 박사 재출마 청원 대회를 열었다.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우의마의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선거(1960년)에 출마하였다. 하지만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1달 앞두고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유일한 대통령후보가 되어, 사실상 당선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진 부통령선거에서는 이기붕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 측의 엄청난 규모의 부정선거(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남 마산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는 의문의 실종을 당했던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곧 이승만은 이 선거가 부정선거로 치러진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자기가 저지른 일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은 어차피 선거여부에 관련없이 당선 확정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였다.

곧 책임자인 이기붕은 당선사퇴를 고려한다 했다가 사퇴하고 물러났다.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도 바로 사퇴했다. 하지만 성난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이승만은 이 요구에 대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라고 발언하며 꽤나 쿨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4·19 혁명). 의외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군중은 오히려 수고했다고 박수치며 환호했다 한다.

망명과 최후

그러나 민주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면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과 이수영 외무부 차관은 이승만에게 하와이 요양을 권하는 형식으로 내보냈다. 민주당 신파이면서도 이승만 처벌에 반대했던 곽상훈은 비밀리에 허정에게 영감 일처리 잘했다고 했다.[10]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이승만을 그냥 내보냈느냐며 반발했다.

그러자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장면이 이승만을 배신했다고 공격했고, 허정에게는 이승만을 요양보내게 한다면서 영원히 못돌아오게 했느냐고 따졌다.[11]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이곳에서 생을 보내다가 실어증 등에 걸려 하와이 마우레타니아 요양원에 입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원인은 뇌일혈이었다.[12]

알고 계셨나요?

  • 이승만은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대신에, 이승만은 강대국-특히 미국-과의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하였습니다. 비록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독립을 건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이승만이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석

  1. ^ 서정주, 우남 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1995) 참조
  2. ^ 이때 김규식도 오스트레일리아로 박사학위 취득하러 출국한다는 명분으로 피할 수 있었다.
  3. ^ 동시에 이승만과 갈등했던 이동휘 계열의 사회주의자 집단, 신채호 등 아나키스트 집단도 임시정부의 다른 인사들과 갈등하다가 떠나게 된다.
  4. ^ 이승만과 동지였다가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적이 된 우성 박용만과,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이자 대통령 취임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두 명의 박용만이 있다. 보통 전자는 아호를 붙여 우성 박용만으로 부른다.
  5. ^ 「김구(金九)가 이승만(李承晩)에게」, 김구, "백범 김구선생의 편지", (도서출판 나남, 2005)
  6. ^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쪽
  7. ^ 4월의 임시정부 소사
  8. ^ 이윤영, 백사 이윤영 회고록, (집문당, 1984)
  9. ^ 박경석, 오성장군 김홍일, 서문당, 1984
  10. ^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 ^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동산회고록 (삼성출판사, 1991)
  12. ^ 경향신문 1965.07.20. 1면 정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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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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