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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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 직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3·15 부정선거 또는 3·15 개표조작대한민국에서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부정선거이다. 원래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자리였으나 선거직후 부정선거로 드러나면서 선거무효 처리되었다.

배경[편집]

무려 86세(한국나이)가 된 이승만은 아직도 대통령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4번째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지지율은 예전만 못했다. 지난 선거에서 상대 유력후보(신익희)가 유세 도중에 사망하여 어부지리로 이승만이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조봉암과 신익희의 선전은 더 이상 국민들이 덮어놓고 무조건 이승만을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자유당 정권은 국민들에게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더욱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개뿔이고, 사악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자유당은 먼저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을 손봐주었다. 진보당은 북한 노동당과 내통하는 이적단체로 고발되어 해산되었으며, 조봉암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959년 사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가리켜 진보당 사건이라고 부른다. 진보당 사건은 당시에도 워낙 속보이는 짓인지라 정치적 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당의 이미지는 막장으로 치달았으며, 민주당 세력은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였다. 이렇게 맛이 갈 때까지 가버린 자유당은 다음 선거를 부정선거로 치룰 계획을 세우는 데에만 매진하였다.

그렇게 선거기간이 시작되고, 자유당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승만의 4선은 불확실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의 선거전도 치열한 전개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조병옥이 선거 1달여 전에 미국으로 신병치료차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되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어 버렸다.[1] 덕분에 자유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6세에 달해 임기 중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임기 중에 사망하게 되면 부통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있었다. 따라서 자유당 입장에서는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야 민주당에게 눈 뜨고 정권을 내주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그동안 갈고닦아온 현란한 부정선거 기술들을 선보였다.

현란한 부정선거 기술[편집]

  • 40%의 표를 사전투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어둔다.
  • 읍, 면, 동 단위로 공무원 중심의 친목회를 실시, 부정선거 방법을 사전 교육시킨다.
  • 3인조, 5인조, 7인조로 유권자를 묶어, 투표당일 이들이 동시에 입장하여 투표용지를 서로 공개하여 보여준 후 투표함에 투입하도록 한다.
  • 유령 유권자를 만들어 투표한다.
  • 고령층 및 신체 부자유 유권자에게 기권을 강요한 후, 기권표를 조작한다.
  • 완장부대를 동원하여 개표장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한다.
  • 개표장을 일시적으로 정전시킨 뒤 투표함을 바꿔치기한다.

선거 결과[편집]

일단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 자유당 측에서는 100% 득표율로 이승만 당선 확정인 대통령 선거를 굳이 부정선거로 치룰 필요가 없었다. 부정선거는 대통령 선거가 아닌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제 3대 대통령선거 당시와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은 무효표로 자신의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이 선거에서는 총 투표수 960만여 표 중 120만여 표가 무효표로 나타났다.

후보자 정당 득표수 %
이승만 자유당 9,633,376 100.00
 
조병옥[2] 민주당 0 0.00
 
무효표 1,228,896
총 투표수 9,633,376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11,196,490 97.0

지역별 득표율[편집]

지역 / 시 · 도
이승만
자유당
득표수 %
수도권 서울특별시 684,146 100.00%
경기도 1,139,927 100.00%
강원도 829,131 100.00%
충청도 충청북도 510,369 100.00%
충청남도 988,180 100.00%
호남
(전라도)
전라북도 919,529 100.00%
전라남도 1,398,887 100.00%
영남
(경상도)
경상북도 1,403,461 100.00%
경상남도 1,632,159 100.00%
제주도 127,587 100.00%

선거 이후[편집]

너무나도 명백한 부정선거였던 터라, 선거일 이튿날인 3월 16일부터 경남 마산[3](현재의 창원시) 지역을 중심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를 마산 3·15 의거라 한다. 시위가 진행 중이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있는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로서 경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를 낸 것이 밝혀지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에서 3,000여 명의 고려대생이 연좌시위를 하고 귀가하던 길에 정치폭력배가 나타나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날 서울 시내 각 대학교에서는 총궐기를 일으켰는데, 이를 4·19 혁명이라 한다. 총궐기 1주일 만인, 4월 26일 이승만은 시민대표 5인과 면담을 실시, 이 자리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발언하면서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전면 수용하였다. 그런데 하야를 결심하기 전 이승만이 한 말은 다소 묘했다-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승만은 부정선거 사실을 잘 몰랐거나 나중에 알았더라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즉 이기붕과 자유당에서 독단적으로 일으킨 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결국 이승만은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바깥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승만이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며 전면 수용한 것이나, 하야 전 마지막 한 발언 등을 살펴볼 때 이승만은 끝까지 자신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여겼던 듯하다.

결국 자유당은 해산되고, 부정선거 혐의로 부통령 당선이 취소된 이기붕은 4월 28일 자살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민주당의 후손들은 이후 선거 결과가 시원찮다 싶을 때마다 3·15 부정선거를 능가하는 부정선거다!라며 선거에 승리한 상대방을 괴롭히게 된다.

주석[편집]

  1. ^ 일각에서는 조병옥 후보가 사망한 것이 사실 자유당 측에서 암살자를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것이라는 음모론을 펼치고 있으나, 별 근거는 없는 소리이다. 이런 쓸데없는 음모론을 너무 많이 믿다보면 명줄만 짧아지니 이런 식의 주장들에는 되도록 신경 쓰지 말자.
  2. ^ 선거 유세 기간 중 사망
  3. ^ 당시에는 영남 지역에 (이승만을 싫어하는) 진보세력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