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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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후보의 13대 대선 포스터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선거대한민국에서 1987년 12월 1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배경[편집]

전두환은 자신의 7년 임기가 끝나가자, 12·12 군사반란의 동지이자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인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은 더 이상 전두환의 독재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재학생이던 박종철이 경찰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 등은 들끓던 여론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야권인사와 종교계인사 등을 중심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를 6월 항쟁이라 한다. 결국 국민적 저항에 굴복한 노태우는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약속한다. 이에 따라 13대 대통령선거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의 원칙을 준수하는 16년만의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되었다.

전개[편집]

민주정의당에서는 전두환의 후원 속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노태우는 선거기간 동안 독재자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노태우는 6·29 민주선언을 통해 국민의 뜻에 승복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외쳤다. 노태우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안정 속에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넓혀나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 결집하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김대중은 일찍이 차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었고, 1987년 7월 10일의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대통령이 되는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나, 바로 다음날인 7월 11일 인터뷰에서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선제를 하면 불출마 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 이로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을 예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일민주당에서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김영삼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자,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끝내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두 명이 모두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이후 김영삼은 부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김대중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유권자를 끌어모으며 서로 자신이야말로 독재를 종식시키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할 강력한 야권후보라고 주장하였다.

김종필은 구 민주공화당(박정희 정권) 세력들을 결집시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총재 자리에 오른다. 자신의 고향인 충남도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불상사[편집]

노태우 후보의 전주 유세장에서 폭력 시위가 발생하며 유세장이 엉망이 되었다. 시민들은 ‘김대중’을 연호하였다.

  •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김대중을 지지하는 광주시민들이 ‘김대중’, ‘양보’를 외치며 폭력시위를 벌여 김영삼 후보는 4분 동안 자제만을 호소하다가 연설은 하지 못하고 연단을 내려와야 했다.

  •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

김영삼을 지지하는 대구시민들이 ‘김영삼’을 외치며 폭력시위를 벌여 돌멩이와 병을 연단을 향해 던지는 소란사태가 벌어졌으나, 이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동단결’, ‘질서유지’를 외치며 분위기가 안정, 김대중은 연설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선거 결과[편집]

야권 표가 김영삼김대중으로 크게 분열되면서 당초 당선 가능성이 낮았던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신군부를 몰아내기 위해 벌인 6월 항쟁이 성공을 거두어 열린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다시 신군부 출신의 인물을 당선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노태우의 전국 득표율은 겨우 37%로서, 이는 대통령선거 역대 최저 득표율 당선이다.

선거유세 중 발생한 폭력시위와 북한 공작원에 의한 대한항공 805편 폭파사고가 ‘안정’을 외치는 노태우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후보자 정당 득표수 %
노태우 민주정의당 8,282,738 36.64
 
김영삼 통일민주당 6,337,581 28.03
 
김대중 평화민주당 6,113,375 27.04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1,823,067 8.06
 
신정일 한주의통일한국당 46,650 0.20
 
무효표 463,008
총 투표수 23,066,419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25,127,158 89.2%

지역별 득표율[편집]

지역 / 시 · 도
노태우
민주정의당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대중
평화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득표수 % 득표수 % 득표수 % 득표수 %
수도권 서울특별시 1,682,824 29.95% 1,637,347 29.14% 1,833,010 32.62% 460,988 8.20%
인천직할시 326,186 39.35% 248,604 29.99% 176,611 21.30% 76,333 9.20%
경기도 1,204,235 41.44% 800,274 27.54% 647,934 22.30% 247,259 8.51%
강원도 546,569 59.33% 240,585 26.11% 81,478 8.84% 49,954 5.42%
충청도 충청북도 355,222 46.89% 213,851 28.23% 83,132 10.97% 102,456 13.52%
충청남도 402,491 26.22% 246,527 16.06% 190,772 12.42% 691,214 45.03%
호남
(전라도)
광주직할시 22,943 4.81% 2,471 0.51% 449,554 94.41% 1,111 0.23%
전라북도 160,760 14.13% 17,130 1.50% 948,955 83.46% 8,629 0.75%
전라남도 119,229 8.16% 16,826 1.15% 1,317,990 90.28% 4,831 0.33%
영남
(경상도)
부산직할시 640,622 32.10% 1,117,011 55.98% 182,409 9.14% 51,663 2.58%
경상남도 792,757 41.17% 987,042 51.26% 86,804 4.50% 51,242 2.66%
대구직할시 800,363 70.69% 274,880 24.28% 29,831 2.63% 23,230 2.05%
경상북도 1,108,035 66.38% 470,189 28.17% 39,756 2.38% 43,227 2.58%
제주도 120,502 49.77% 64,844 26.78% 45,139 18.64% 10,930 4.51%
지역별 최다 득표자는 진한색으로, 25%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한 후보는 연한색으로 배경을 처리하였다.
각 후보들의 지역별 득표수

호남서울에서 김대중 몰표, 충남에서 김종필 몰표가 나온 것을 제외하면, 전 지역에서 노태우김영삼이 1-2위를 다투었다. 즉, 야당 후보가 김영삼으로 단일화되었더라면 야당이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 수도권: 야당표가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크게 분열되면서 어부지리로 여당후보인 노태우가 가장 많은 득표수를 가져갈 수 있었다. 다만 서울에서는 타 지역들과 달리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유난히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당시에 기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호남주민들이 일자리를 찾기위해 서울로 이동하는 현상(이촌향도, 離村向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 영남: 노태우의 연고지인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노태우가 크게 선전하였다. 대구에서는 노태우의 득표율이 7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대로 김영삼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지역에서는 김영삼이 크게 선전하였다. 부산에서는 김영삼의 득표율이 55%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선거는 영남지역(정확히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를 밀어준 마지막 선거가 되었다.
  • 호남: 김대중의 연고지인 호남지역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90%에 이르는 독재자급 득표율(광주 94%, 전남 90%, 전북 84%)을 기록하였다. 여론조사에서는 김대중의 득표율이 이렇게까지 높게 나타나지는 않아서, 이 같은 결과에 호남주민 스스로도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 충남: 김종필의 연고지인 충남지역에서는 김종필 후보가 45%로 몰표를 받았다.
  • 강원/충북: 전통적인 보수 성향 지역인 강원/충북지역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선전하였다.

선거 이후[편집]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노태우는 5년 임기동안 민주화 정착, 경제발전, 북방외교 등의 성과를 기록하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하지만 노태우는 12·12 쿠데타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임기 동안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김대중은 이 선거를 부정 및 불법 선거로 규정하며, 투쟁의 뜻을 밝혔다. 김대중은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다면 자신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대중의 '통수'(대통령 불출마 번복)는 민주투사 동료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관계를 영원히 끊어놓게 된다. 만약 이때 김대중이 김영삼의 통수를 치지 않았다면 부산-경남-호남 지역이 함께 진보진영의 텃밭으로 묶이며 영-호남 지역갈등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이후 3당합당 과정을 거쳐 부산-경남 지역은 대구-경북 지역과 함께 보수진영의 텃밭으로 묶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