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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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 후보들의 선거벽보 오른쪽 사람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선거대한민국에서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배경[편집]

김대중 정권은 임기 말기에 접어들면서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고,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비리 혐의로 줄줄이 구속되는 등 측근비리로 몸살을 앓았다.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있던 2002년의 대한민국은 한일 월드컵 4강 진출과 제2연평해전 발발, 그리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는 사건 등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도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인제가,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이 대통령 후보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 후보 선출[편집]

김대중 대통령을 배출시켜서 여당이 된 새천년민주당은 차기 대통령 후보를 고심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새천년민주당은 사상 최초로 당내 경선을 국민참여경선 방식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본래 경선에는 당에 회비를 납부하는 당원들만 참가할 수 있었으나, 이번 경선에서는 당원이 아닌 일반국민들도 경선에 일부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당원과 일반국민의 표 비율은 1:1로 정하였다. 또한, 경선을 한날한시에 한꺼번에 시작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16개 지역을 돌아다니며 치러지는 지역순회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경선은 각본 없는 16부작 드라마라고 불리며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경선 직전까지만 해도 새천년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이인제가 무난히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인제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제3후보로 출마하여 1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과시하였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젊고 경쟁력 있는 후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MBC 앵커 출신인 정동영, 영남 후보 김중권, 리틀 DJ 한화갑 등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럼 노무현은? 김대중 정권 동안 해양수산부 장관 자리를 7개월 동안 맡은 것 외에는 딱히 한 일도 없었고, 사실상 듣보잡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경선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 제주경선 (2002년 3월 9일) :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한화갑이 175표로 1위, 이인제가 172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노무현은 125표로 깜짝 3위를 차지하였으나, 사람들의 관심사항은 아니었다.
  2. 울산경선 (3월 10일) : 영남후보론이 이슈로 떠오르고, 자연스레 김중권과 노무현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노무현은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 솜씨를 보여주며 298표로 1위, 김중권은 281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3. 광주경선 (3월 16일) : 광주는 민주당의 정신적 수도인만큼, 광주경선은 경선의 판도를 결정지을 경선으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랬다. 당초 선전이 예상되던 이인제 후보는 그동안의 철새정치인 행보로 정체성 시비의 직격탄을 받았고, 민주당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영남표가 절실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영남 후보인 노무현이 595표로 1위를 차지하고, 이인제는 491표로 2위에 머물게 된다. 경선에 앞서 3월 13일의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후보가 나오고 새천년민주당에서 이인제 후보가 나오면 이회창이 당선되지만, 노무현 후보가 나오면 노무현이 당선될 것으로 나타난 것이 노무현 돌풍(노풍)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4. 대전경선 (3월 17일) : 이인제의 연고지인 만큼, 이인제가 894표로 압도적인 1위, 노무현이 219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5. 충남경선 (3월 23일) : 한화갑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참패가 예상되자, 경선을 포기한다. 이인제의 고향(충남 논산)에서 치러진 경선 결과 이인제가 1432표로 압도적인 1위, 노무현이 277표로 2위를 차지하며 노풍은 위기를 맞는다.
  6. 강원경선 (3월 24일) : 이제 대결은 노무현 VS 이인제 대결로 압축된다. 노무현이 630표로 1위, 이인제가 623표로 2위를 차지한다.
  7. 경남경선 (3월 30일) : 김중권이 경선을 포기하면서 이제 노무현은 유일한 영남 후보가 되었다. 노무현의 고향(경남 김해)에서 치러진 경선인만큼, 노무현이 1713표로 압도적인 1위가 되고, 이인제는 463표에 머문다. 경남경선은 노무현이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경선이 되었다.
  8. 이후 노무현은 노풍을 이어가며 전북, 대구, 인천, 경북, 전남, 부산, 서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인제는 연고지인 충북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나 곧 망조의 조짐을 느끼고 부산 경선 직전에 경선을 포기한다. 그렇게 노무현은 각본 없는 16부작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4월 27일).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차기대통령 자리만을 바라보던 이인제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나타나 하루아침에 대통령후보 자리를 빼앗은 노무현이 곱게 보일 리 없었고, 속으로 노무현 타도를 외쳤다.

노풍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차적으로는 노사모로 대표되는 인터넷 정치인 팬클럽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무현의 행적-5공 청문회에서의 활약, 3당 합당 거부(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지역타파 노력(번번이 낙선하면서도 총선에서 부산 지역구에 지속적으로 출마)은 당시 신문물이었던 인터넷을 통해 젊은 유권자(386세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나갔다. 결국 노풍의 근원지는 인터넷이었던 셈이다.

한나라당 후보 선출[편집]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이 국민경선을 도입하여 흥하는 모습을 보고 역시 같은 방법으로 치러지는 국민경선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는 당내에서 거의 독재자급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이회창이 너무나도 싱겁게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정몽준의 등장, 노풍의 위기[편집]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후보가 정해진 직후인 5월 2일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은 43%, 이회창의 지지율은 32.9%로 노무현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큰 지지율 격차는 새천년민주당 경선 흥행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임기 말기에 이르러 김대중의 세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최규선 게이트 등의 측근비리가 불거지자 노풍은 위기에 빠지게 된다. 잘못은 김대중 측근이 하고, 욕은 노무현이 먹고... 이 와중에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이 4강 진출에 성공하면서 전 국민은 축구에 잠시 미쳐있었다. 그 결과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성공에 큰 공을 세운 정몽준 FIFA 부회장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고, 드디어는 정몽준을 대통령으로!라는 목소리도 나오게 된다. 월드컵 개최 도중에 치러진 제3회 지방선거(6월 13일)에서는 노무현이 이끄는 새천년민주당은 광주, 전남, 전북, 제주에서만 광역단체장 자리를 지켜내었을 뿐, 수도권과 영남 지역에서 모두 패배하여 민주당이 지방선거 사상 최악의 참패를 겪었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이 월드컵에 정신이 팔려있던 터라 낮은 투표율이 나왔고, 이것이 민주당 참패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나, 아무튼 선거 패배의 일차적 책임자인 노무현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선거를 불과 3달 남겨둔 9월 5일의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의 지지율이 30.2%, 정몽준의 지지율은 29.6%인데 비해 노무현의 지지율은 17.6%에 머물면서 여당 대통령 후보를 월드컵 스타 정몽준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편집]

여당에서는 결국 노무현과 정몽준을 후보 단일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처음에는 지지율이 높던 정몽준 후보가 더 유력해 보였으나, 이후 노사모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11월 24일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앞서나갔고, 결국 대통령 후보는 노무현으로 단일화 되었다. 단일화 직후인 11월 26일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5.2%, 노무현 42.2%로 나타나면서 노무현의 당선이 점쳐지기 시작하였다. 노무현과 후보단일화를 이룬 정몽준은 노무현을 따라 유세를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TV 토론[편집]

TV 토론은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의 세 명의 후보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노무현의 행정수도 충청 공약을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민주노동당 소속의 제3후보인 권영길은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주목을 받았다.

병풍 시즌 2[편집]

지난 선거에 아들의 병풍(兵風, 병역비리 의혹)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이회창은 이번 선거에서는 좀 잠잠해...질 줄 알았으나, 갑자기 김대업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체중이 미달된 것으로 나타난 진단서 자체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나중에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업은 관심종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미 이회창의 대쪽 이미지에는 금이 간 후였다.

선거 광고[편집]

  • 노무현 후보의 CF

노무현 후보의 상록수 CF는 감성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386세대들이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며 불렀던 노래 ‘상록수’를 노무현이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르는 모습은 386세대의 많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 이회창 후보의 CF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한 순간의 인기에 따라서 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정치계에서 충분히 검증받은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노무현에 비유한 첫 번째 버스기사가 결국 끔찍한 교통사고를 내고 마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을 넣음으로서 유권자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였다.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선언[편집]

그렇게 선거는 노무현 굳히기가 되는 듯 했으나... 선거일을 하루 앞둔 12월 18일에 있었던 사건은 선거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12월 18일 저녁, 노무현과 정몽준은 서울 명동에서 마지막 합동 유세를 하고 있었다. 정몽준은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였으나, 그래도 마음속에 차기 대통령은 내꺼라는 소망을 품고 나름 열심히 노무현의 당선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세지에서, 노무현은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든 사람을 발견하고, 이런 발언을 하였다. “너무 속도위반하지 마라. 제가 새로운 정치하지 않고 어물어물하면 제 멱살을 잡고 흔들 우리 여자 지도자 추미애가 있다. 또 제가 흔들릴 때 제 등을 받치면서 민주주의 정통성을 살려야 한다고 한 정동영 고문은 어떠냐. 또 몇 사람 있다.” 이 발언을 들은 정몽준은 노무현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모욕감을 느꼈으며(한 마디로 삐쳤다), 결국 선거일을 불과 1시간 30여분 남겨둔 12월 17일 오후 10시 30분,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하였다(철회 선언을 할 때에는 다른 핑계를 댔음). 깜짝 놀란 노무현은 용서를 빌기 위해 정몽준의 집앞까지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선거가 시작되는데...

선거 결과[편집]

선거일에 노사모 회원들은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투표를 독려하면서 젊은층의 높은 투표율을 이끌어 내었다. 한편, 16대 대선 개표방송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영남 지역의 투표함이 먼저 개봉되면서 처음에는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를 크게 앞서가면서 한나라당사에서 환호가 터져 나오다가, 개표가 30%정도 이뤄지던 즈음에 수도권 지역의 투표함이 개봉되기 시작하면서 경합 끝에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당사 분위기는 역전되었고, 결국 노무현 후보가 득표율 +2.3%차, 득표수 57만 표차로 승리를 거두었다.

예상과는 달리 정몽준의 지지철회 선언은 선거 결과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정몽준이 비겁한 배신자, 한순간의 감정을 못이기는 소인배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정몽준의 대통령 꿈은 영영 물 건너갔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3.9%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실제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많았지만, 권영길을 지지하는 진보성향 유권자가 ‘될 후보를 밀어주자’는 생각으로 노무현을 지지했기 때문에 득표율 자체는 미비하게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은 이 선거를 계기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진보정당, 제3정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후보자 정당 득표수 %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12,014,277 48.91
 
이회창 한나라당 11,443,297 46.58
 
권영길 민주노동당 957,148 3.89
 
이한동 하나로국민연합 74,027 0.30
 
김길수 호국당 51,104 0.20
 
김영규 사회당 22,063 0.08
 
무효표 223,047
총 투표수 24,784,963 100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34,991,529 70.8%

지역별 득표율[편집]

지역 / 시 · 도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이회창
한나라당
득표수 % 득표수 %
수도권 서울특별시 2,792,957 51.30% 2,447,376 44.95%
인천광역시 611,766 49.82% 547,205 44.56%
경기도 2,430,193 50.65% 2,120,191 44.18%
강원도 316,722 41.51% 400,405 52.48%
충청도 대전광역시 369,046 55.09% 266,760 39.82%
충청북도 365,623 50.41% 311,044 42.89%
충청남도 474,531 52.15% 375,110 41.22%
호남
(전라도)
광주광역시 715,182 95.17% 26,869 3.57%
전라북도 966,053 91.58% 65,334 6.19%
전라남도 1,070,506 93.38% 53,074 4.62%
영남
(경상도)
부산광역시 587,946 29.85% 1,314,274 66.74%
울산광역시 178,584 35.27% 267,737 52.87%
경상남도 434,642 27.08% 1,083,564 67.52%
대구광역시 240,745 18.67% 1,002,164 77.75%
경상북도 311,358 21.65% 1,056,446 73.46%
제주도 148,423 56.05% 105,744 39.93%
지역별 최다 득표자는 진한색으로,
4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한 후보는 연한색으로 배경을 처리하였다.
16대 대선 지역별 득표수

노무현 후보가 노풍으로 수도권 민심을 잡고,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세워 충청을 지켜내고, 울산, 부산,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영남권 표까지 확보하면서 당선되었다. 민주당 후보가 보수표 분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정면 대결을 통해 당선된 첫 사례이자 마지막 사례다.

  • 수도권 (+72만 표): 지난 대선보다도 진보 성향이 더 뚜렷해지며 노풍의 진원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서울은 경기, 인천지역에 비해 진보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이나 이번 선거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서울에는 약간 악재로 작용한 셈이다.
  • 영남 (-297만 표)
    • 부산, 울산, 경남: 김대중이 출마하여 당선되었던 지난 대선에 비해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이 두 배 정도 증가하며 영남후보론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역은 정몽준의 연고지인 울산이고(15%→35%), 노무현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15%→30%)과 진짜 고향 경남(11%→27%)에서도 지난 선거에 비해 많은 득표에 성공한다. 노무현은 영남, 특히 부울경 지역에서의 지역감정 타파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다.
    • 대구, 경북: 상대적으로 노풍의 위력이 덜했다.
  • 호남 (+260만 표): 영남후보인 노무현은 호남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당선된 지난 선거와 비교해봐도 득표율상의 큰 차이는 없었다.
  • 충청 (+26만 표): 충청지역주의 정당인 자민련이나 김종필의 협조가 없는 상황에서도 노무현 후보가 상당히 선전하였다. 충청지역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공약이 잘 먹혔다고 볼 수 있다.
  • 강원 (-8만 표): 보수 성향이 크게 감소하였다.
  • 제주 (+4만 표)

선거 이후[편집]

노무현이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참여정부를 출범시켰다. 여러 급진적인 국가 개혁안들을 실행에 옮기려 하였으나, 취약한 권력 기반 탓에 뜻대로 잘 되지는 못하였다. 심지어 취임 2년차인 2004년에는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손을 맞잡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발효시켜 대통령의 권한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다.

새파란 정치 신인에 한 방 먹은 이회창은 착잡한 심정으로 ‘야당’ 한나라당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누군가들이 전자개표기(대선에서는 최초로 도입됨)가 조작이 가능하다는 개소리를 슬금슬금 하더니 한나라당도 여기에 넘어가 대선 결과에 따르지 않겠다며, 재검표를 요구하였다. 결국 1,100만 표에 이르는 표들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재검표하기에 이르렀는데, 재검표 결과가 원래 선거 결과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한나라당은 공식 사과하며 망신살이 했다.

정몽준은 후보단일화 조건으로 총리 권한 강화 개헌 등 각종 이권을 약속받고 있었으나, 하루 전에 계약을 스스로 파기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