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선거
“ | 대한민국 역사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 | ”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선거는 대한민국에서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이다.
배경[편집]
김영삼 정권은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기록하는 등 실정으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어갔고, 반대로 야권의 힘은 강해져갔다. 김대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계은퇴선언을 뒤엎고 정치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1995년 9월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1995년 9월)하고 총재 자리에 오른다.
임기 말 김영삼 정권은 IMF 사태 속에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속수무책으로 파멸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쏟아졌으며, 대기업들은 줄줄이 부도사태를 내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7%까지 폭락하였다.
김영삼한테 버림받은 김종필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1995년 3월)하고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확장해 간다.
전개[편집]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김대중 말고 다른 인물을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는 관계로 김대중이 압도적인 지지율 속에 대통령 후보로 선출(1997년 5월)되었다.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박찬종 등 9명이 당내경선에 도전했으며, 세간에서는 이들을 9룡이라고 불렀다. 경선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가 격돌한 끝에 이회창이 선출(1997년 7월)되었다. 경제가 파탄 나고 대통령 지지율이 7%를 찍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1997년 7월의 지지율 조사에서는 이회창 40.4%, 김대중 26.6%로 오히려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어 이회창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이회창은 군사정권 당시 판사로 재직하며 군사정권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깨끗하고 강직한 이미지그리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화는 높은 지지율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1990년 삼당합당으로 인해 전체적인 선거판이 보수 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의 판도를 바꿔놓은 것은 다름 아닌 병풍(兵風, 병역비리)이었다. 이회창의 두 아들이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것이다. 첫째아들의 경우 첫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55kg으로 현역판정을 받았으나 미국유학 이후 치러진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45kg으로 나오면서 면제 판정을 받았다. 또한, 둘째아들의 경우에도 역시 첫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51kg으로 현역판정을 받았으나 이후의 신체검사에서 41kg이 나와 면제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이회창이 권력을 남용하여 아들의 신체검사결과를 이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회창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병역비리 여부를 떠나서 군 문제에 민감한 한국인의 정서상 두 아들 모두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사실 자체로도 이회창의 대쪽 같은 이미지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하였다. 병역의혹 직후(1997년 8월)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15%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이회창의 병풍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네거티브 전략이 되었다.
병역비리로 이회창이 홍역을 치르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 사람은 김대중 후보만이 아니었다. 이회창과의 경선 끝에 아깝게 패배한 이인제는 기회는 이때다!를 외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1997년 10월,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국민신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인제의 갑작스런 대통령 출마는 보수표를 이회창과 이인제로 크게 분열시켜 이후 김대중이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회창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김대중은 여전히 호남의 정치적 고립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김대중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충청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연합이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당선될 경우 총리 자리는 김종필에게 내어줌과 동시에 내각제 개헌을 통해 총리의 권한을 강화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일명 DJP 연합(=김DJ+김JP, 1997년 11월 후보단일화)이라고 불리는 이 연합은 김대중의 연고지가 호남+충청지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민주투사’ 김대중과 ‘박정희의 후예’ 김종필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3당합당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대중의 빨갱이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회창은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순과 합당하고 한나라당을 출범(1997년 11월)하였다. 이회창은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는 대가로 한나라당의 총재 자리는 조순에게 넘겨주었다.
선거 광고[편집]
- 김대중 후보의 CF
김대중 후보의 CF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수작으로 손꼽힌다. 당시 힛트곡이었던 DJ DOC의 <DJ DOC와 춤을>을 패러디한 흥겨운 CM송으로 김대중에 대한 이미지를 젊고 활기차고 친근하게 만들었다는 평이다.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 준비된 대통령 등 보수적인 멘트를 사용하여 기존의 좌익 용공주의자 이미지에서 탈피하였다. 16초쯤에 노무현의 얼굴이 갑자기 클로즈업되어 잡히는데, 이는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되는 것을 정확히 예언한 것이다(이 당시 노무현은 듣보잡 정치인이었다).
- 이회창 후보의 CF
김대중의 정계은퇴 번복 등을 부각시키면서 이회창의 ‘대쪽 이미지’와 대조시켰다. 이회창이 등장하여 약속한 것은 반드시,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고 발언하였다.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선거 결과[편집]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득표수 72만 표, 득표율 1.5%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였다. 워낙 살얼음판 싸움이라, 이회창 아들 병역비리/이인제 대선출마로 인한 보수표 분열/DJP연합 성공 등의 요인들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김대중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후보자 | 정당 | 득표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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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 새정치국민회의 | 10,326,275 | 40.27 | ||
이회창 | 한나라당 | 9,935,718 | 38.74 | ||
이인제 | 국민신당 | 4,925,591 | 19.20 | ||
권영길 | 건설국민승리21 | 306,026 | 1.19 | ||
신정일 | 통일한국당 | 61,056 | 0.23 | ||
김한식 | 바른정치연합 | 48,717 | 0.18 | ||
허경영 | 공화당 | 39,055 | 0.15 | ||
무효표 | 400,195 | – | |||
총 투표수 | 26,042,633 | 100 | |||
등록된 투표자수/투표율 | 32,290,416 | 80.7% |
지역별 득표율[편집]
지역 / 시 · 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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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
이회창 한나라당 |
이인제 국민신당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수도권 | 서울특별시 | 2,627,308 | 44.87% | 2,394,309 | 40.89% | 747,856 | 12.77% | ||
인천광역시 | 497,839 | 38.51% | 470,560 | 36.40% | 297,739 | 23.03% | |||
경기도 | 1,781,577 | 39.28% | 1,612,108 | 35.54% | 1,071,704 | 23.62% | |||
강원도 | 197,438 | 23.76% | 358,921 | 43.19% | 257,140 | 30.94% | |||
충청도 | 대전광역시 | 307,493 | 45.02% | 199,266 | 29.17% | 164,374 | 24.07% | ||
충청북도 | 295,666 | 37.43% | 243,210 | 30.79% | 232,254 | 29.40% | |||
충청남도 | 483,093 | 48.25% | 261,802 | 26.14% | 235,457 | 23.51% | |||
호남 (전라도) |
광주광역시 | 754,159 | 97.28% | 13,294 | 1.71% | 5,181 | 0.66% | ||
전라북도 | 1,078,957 | 92.28% | 53,114 | 4.54% | 25,037 | 2.14% | |||
전라남도 | 1,231,726 | 94.61% | 41,534 | 3.19% | 18,305 | 1.40% | |||
영남 (경상도) |
부산광역시 | 320,178 | 15.28% | 1,117,069 | 53.33% | 623,756 | 29.78% | ||
울산광역시 | 80,751 | 15.41% | 268,998 | 51.35% | 139,824 | 26.69% | |||
경상남도 | 182,102 | 11.04% | 908,808 | 55.14% | 515,869 | 31.30% | |||
대구광역시 | 166,576 | 12.53% | 965,607 | 72.65% | 173,649 | 13.06% | |||
경상북도 | 210,403 | 13.66% | 953,360 | 61.92% | 335,087 | 21.76% | |||
제주도 | 111,009 | 40.57% | 100,103 | 36.59% | 56,014 | 20.47% | |||
지역별 최다 득표자는 진한색으로, 33%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한 후보는 연한색으로 배경을 처리하였다. |
- 수도권: 최대 인구밀집지역인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이 근소한 차로 이회창을 눌렀다(서울 +4.0%, 인천 +2.1%, 경기 +3.7%). 수도권 전체가 김대중 편으로 돌아선 것은 IMF로 인한 여당에 대한 민심 악화와 이회창 아들의 병역면제 영향이 컸다.
- 영남: 표가 이회창-이인제로 크게 양분되면서 이회창은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50%대, 대구-경북지역에서 60~70%대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 호남: 광주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97%를 넘기는 등 만장일치급으로 김대중을 밀어주었다
다시는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득표율. 호남지역의 인구는 영남지역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결집력 면에서 넘사벽급이 되면서 영-호남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 충청: DJP연합이 성공을 거두면서 김대중이 비교적 큰 차로 이회창을 압도했으며, 그 효과는 충북지역 보다는 김종필의 연고지인 대전-충남지역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충북 +6.6% / 대전 +16%, 충남 +22%).
- 강원: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강원지역에서는 득표율로는 이회창이 크게 선전하였으나 인구가 적은 탓에 선거에 큰 영향은 주지 못하였다.
선거 이후[편집]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김대중 정권은 먼저 지난날의 갈등을 정리하고, 대화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명분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킨다. 이후 IMF 사태가 빠르게 해결되며 대한민국의 경제는 미국의 경제호황과 더불어 빠르게 개선된다.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시킨 김대중은 북한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영예도 안는다.
이회창은 야당이 된 한나라당에서 총재 자리까지 오르는 등, 입지를 더욱 굳혀간다. 이회창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사람들이나 김영삼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젊은 피를 수혈하는 등 당내 물갈이에 힘쓴다. 김대중 정권을 견제하며 다음 대선을 준비한다.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당선에 큰 공을 세운 김종필은 당초의 계약내용대로 총리로 임명된다. 하지만 김대중은 내각제 개헌 약속은 끝까지 지키지 않았고, 결국 김대중한테 실컷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김종필은 한나라당 편에 붙게 된다. 김종필은 이로서 김영삼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는데 이용당한 후 두 명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이인제는 국민신당 해산과 함께 집권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하고,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간다. 물론 노무현이란 듣보잡 정치인이 튀어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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